항일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의 중심은 언제나 남성을 중심으로 서술됐으며, 남성의 역사로 기억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독립투쟁의 주체는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은 단지 그의 아내로 부차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제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본격화되고 있다. 여성은 국내외 독립운동의 핵심 동반자로 활동한 것을 넘어 근대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낸 경우에서부터 다소 천시 받았던 기생 등 기층민중 출신의 독립운동까지, 그 폭은 넓고 깊었다. 다시 ‘세상의 절반’인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그 빛나는 업적들이 하나씩 역사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항일독립투쟁 속의 여성독립운동

근대 여명기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도 없이 누구의 딸로, 누구의 어머니로, 누구의 아내로만 기억됐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은 조국을 식민지의 암흑으로 몰아넣었지만, 이 위기는 조선의 여성을 반만년 역사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성’을 회복한 항일독립운동

근대 여성운동이 여성 스스로 평등한 인격과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면, 한국 여성운동의 기원은 18~19세기부터 태동한 사회체제의 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 전유물인 학문과 문필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났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여성이 구체적인 교육의 현장으로 진입하면서 여성은 사회의 중심으로 향하게 된다. 특히 민족종교 동학 등은 절대적 인간평등론을 설파하면서 주부의 직능을 소중한 가치로, 여성을 사회와 가정의 주인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렇게 19세기 후반 우리 사회의 근대적 여권사상이 확립되고 근대 교육이 뿌리를 내려가면서 여성단체의 활동도 점차 활발하게 이어지고 여권운동은 새로운 장을 열어가게 된다.

한반도에 밀어닥친 일제의 침탈과 3·1운동을 기점으로 드디어 여성은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전면적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여성은 이제 남녀가 절대 평등의 민주주의 공화정부 국가수립을 위해 남자와 똑같이 항일민족운동을 행하는 것이 국민된 의무라고 확신했다. 여성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노동운동,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끊임없이 벌였으며, 새로운 정치사회이념인 사회주의를 수용해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3·1운동에 대한 이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 3월 1일 정부는 75명의 여성을 독립운동자로 서훈했다. 이날 유관순 열사에게는 독립유공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00년 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여성들은 운동의 주체로 사실상 이제까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에는 여성이 없었지만 민족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은 3·1운동의 현장을 분명하게 지켰으며 투쟁의 대오를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이날의 서훈과 추서는 오늘날 근대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민족여성’을 분명히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로 3·1운동 중 거리와 감옥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저항과 그에 대한 기억은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집단으로 시위를 벌이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는 것은 여성들 스스로에게도 새로운 체험이었으며, 그 광경은 한국 근대여성사의 새로운 장면으로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기록은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이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조선인들의 가슴 속에 증오와 분노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일본 식민주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싸운 여성들의 실천은 독립운동인 동시에 여성 주체의 여성운동이자 폭력에 저항한 평화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한국의 민족운동사와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지만 여성운동사에 있어서도 3·1운동은 빠뜨릴 수 없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 신문도 “조선 신진여성으로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를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보도할 정도로 3·1운동은 여성의 삶과 여성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3·1운동 이후, 여성독립운동의 변화

3·1운동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항일여성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갔다. 식민지 지배와 봉건적 유습의 멍에를 벗어버림으로써 평등한 세상의 자주독립국을 지향해 나간 것이다.

우선 문맹여성에 대한 새로운 교육운동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단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된 여성교육은 여성을 당당한 여성독립운동의 전사로 나서게 했고, 드디어 곳곳의 항일운동 현장에서 여성이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식민지 경제 지배를 벗어나려는 물산장려운동,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착취를 벗어나려는 노동운동 등 다양한 조직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균열을 내기 위해 싸워나갔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이래 분열 양상을 겪던 여성단체는 1927년 근우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뭉쳐, 여성운동이 독립운동과 연결되고 발전하는 모양을 보였다. 전국적으로 지회를 조직해 나간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항일운동의 기세가 높아갈 때도 여학교 등을 동원하는 힘을 발휘하며 여성의 항일운동 참여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만방에 과시했다.

근우회 운동은 1931년 분규와 일제측의 탄압, 재정적 문제로 신간회 해체와 더불어 소멸됐지만 광복과 독립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가진 여성들은 일본인으로의 동화를 거부하며 우리 생활과 문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한편, 해외에서의 의열활동에 온몸으로 참여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게 된다.

당당한 세상의 중심으로 일어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항일독립운동을 거치며, 여성은 우리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이제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인격으로 인정받고, 삶과 실천이 역사로 기록되는 여성이 된 것이다.

담대한 용기로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은 스스로 짊어진 한계를 벗어나 의열단원으로 광복군으로 나서며 조국 광복의 길을 여는데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그 열정과 실천을 기반으로 우리는 광복의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여성독립운동과 여성독립운동가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 역사의 빈 곳을 채우는 작업이다. 그것은 잊혀져왔거나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여성의 역사를 통해 온전한 독립운동사를,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여성학자들은 당시의 여성들이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기존의 여성 관념을 넘어섬으로써 독립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여성인권과 평화의 주체가 됐다”고 평가한다.

3·1운동 100년을 넘어서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뤄낸 우리 사회는 이제 한국근현대사와 세상의 절반이자, 스스로의 역사를 써가는 여성의 역사에서 ‘여성독립운동사’의 빛나는 모습을 되살려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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