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가는 6월.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기억한다. 그리고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 대한민국을 되찾고, 지키고, 바로 세운 모든 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다시 맞는 호국보훈의 달과 6·25전쟁 70주년은 ‘기억’ ‘함께’ ‘평화’라는 단어로 다가온다. <나라사랑>은 나라를 지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6·25전쟁의 한 장면 ‘낙동강방어선전투’를 기억하면서, 함께 호국을 생각하고 다시 평화를 바라보고자 한다.

전쟁은 과거이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과거를 딛고 오늘이 있다. 우리에게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자 상처이지만, 기억하면서 모두가 한걸음 내디뎌야 할 커다란 숙제이기도 하다. 그 숙제를 위해 우리는 과거를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전쟁에 무엇이 있었던가.

6·25전쟁에서 떠오르는 장면 중 핵심적인 장면의 하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를 지켜낸 낙동강에서의 혈투이다.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실패했다면 인천상륙작전도, 압록강까지의 북진도, 3년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휴전도 없었을 것이다.

최대 위기,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6·25전쟁의 최대 위기 낙동강전투. 전쟁 발발 2개월 여 만에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점령당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한 상황이지만 전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기 위한 국군과 유엔군은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대구의 관문인 왜관과 다부동 등에서 ‘전쟁의 명운’을 건 결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당시 낙동강전선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냐, 죽음이냐(Stand or die)”라는 비장한 명령을 내리고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우리 국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나서 전장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나이도, 성별도 문제되지 않았다. 군인에게 탄약과 음식을 날라준 노무부대까지 모두 전쟁의 주역이었다.

낙동강방어선은 왜관 칠곡을 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의 배수진에서 벌어진 전투인만큼 전투는 지속적이고 치열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은 서북쪽 북한군 지역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인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303고지-328고지-수암산-유학산-356고지-273고지-위천. 다부동 방어의 전략적 요충인 이곳은 대구로 빠지는 교통의 요충이기에 공격하는 쪽에서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당연히 수비하는 국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간이었다.

8월 1일에서 3일, 낙동강 외곽선을 지키기 위해 새롭게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 주민을 소개한 후 낙동강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했다. 인도교를 건너지 못한 피란민들의 희생이 뒤따랐지만 부득이한 결단이었다.

8월 4일, 교량 폭파 후 초기 방어선으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유엔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낙동강을 넘어서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국군 11연대와 15연대, 12연대가 각각 새벽 역습 등을 통해 상실했던 고지를 탈환하고 북한군을 낙동강 서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2단계 전투는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주 저항선의 공방전이다. 다부동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그 중심이다. 북한군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잡은 15일이 다가오자 총공세를 재개했고, 이에 맞서 국군이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북한군 공세가 격해지자 아군은 16일,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B-29 전략폭격기 98대를 동원한 융단폭격을 실시했다. 단 26분간 960톤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되면서 적의 사기는 결정적으로 꺾였고, 마지막 승부를 향한 시간이 흘렀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힘 얻은 55일간의 전투

18일부터 위기를 의식한 북한군의 단말마적 공세가 시작됐고 육박전까지 이뤄지는 일진일퇴가 계속됐다. 특공대를 동원한 기습 교란작전까지 진행됐으나 미군 2개 연대의 지원까지 받은 아군은 20일 밤 전차전 등을 통해 유학산을 탈환하고, 다부동의 위기를 수습했다.

3단계 전투는 9월 15일까지 전투지대 재조정 후 동명과 지천일대의 공방전, 4단계 전투는 9월 24일까지 반격을 위한 북한 방어선 돌파로 이어진다. 북한군으로써는 승부를 건 낙동강 중류의 ‘9월 총공세’로 전황의 만회를 시도했다.

9월 4일, 왜관-다부 일대의 주저항선이 붕괴되면서 부산으로의 이동까지 고려되는 위기상황이 벌어졌으나 9월 10일 영천전투의 승리를 통해 아군의 낙동강방어선 철수계획도 극적으로 철회됐다. 이어 사전에 기획됐던 인천상륙작전 등이 성공하면서 이를 확인한 한미 연합군의 총반격이 힘을 얻었고, 결국 9월 24일 55일간의 다부동전투는 승전과 종료를 선언하게 됐다.

6·25전쟁의 최대의 위기이자 대한민국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낙동강방어선은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함께 참전한 주민들의 피땀으로 지켜졌다. 애국에는 나이와 성별이 없었고, 호국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전투가 바로 낙동강방어선전투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우고 또 싸웠다. 위대한 애국정신이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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