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는 ‘청산리 대첩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열렸다.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전지명) 주관으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단국대 한시준 교수 사회로 김주용 원광대 교수(해방 전 만주지역 한인사회 형성과 변화),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북로아군실전기를 통해 본 청산리 대첩의 군사 전술적 고찰), 장윤정 단국대 교수(노래로 본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등이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세미나는 무관객 비대면으로 진행됐으며 온라인 유튜브로 송출됐다.

김주용 교수는 ‘해방 전 만주지역 한인사회 형성과 변화’ 발표에서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 대첩과 같이 3·1운동 이후 더욱 거세진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협할 만큼 강력했고 이에 일제는 간도출병이라는 반인륜적 행위로 대응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일제는 제도적으로 한인사회를 통제할 목적으로 삼시협정을 중국과 체결하며 재만 한인들의 자치문제가 심각하게 훼손됐고 그 결정판이 만주사변이었다”면서 “만주사변 이듬해 만주국이 건국되고 일제는 독립군의 보급창고라고 여겼던 한인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안전농촌을 설치해 실질적으로 한인들을 일제를 위한 안정적인 식량보급대 역할을 하도록 했다”며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안전농촌을 세운 일제로서는 ‘치안의 담보’와 수탈의 가속화를 함께 추진할 수 있었지만 정작 농촌의 주역인 이주 한인들은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안전하게 수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세력은 ‘만주국군’과 ‘만주국 경찰’ 및 관동군의 압박을 견뎌내야만 했다. 한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은 1934년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활동을 끝으로 관내지역(임시정부)으로 그 활동공간을 이동해야만 했다.”

김 교수는 이 논문이 한인(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과 문화적 보존과 변용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편 오늘날 자신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키면서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형태를 일정 부분 복원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김종해 관장은 ‘북로아군실전기를 통해 본 청산리 대첩의 군사 전술적 고찰’ 논문에서 청산리 대첩의 승전요인을 분석했다. 청산리 대첩은 전략적 오류가 없지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암울했던 시기에 임정수립과는 또다른 무장항쟁의 측면에서 온 민족에게 희망을 비춘 쾌거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논문은 다음의 네 가지를 승리 보장의 조건으로 꼽고 있다. 첫째, 북로군정서의 군사 양성과정이 일본과 중국의 최신 양성과정을 경험한 교관의 노하우로 선진화돼 있었다. 둘째, 동포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군수 부문에 있어서 일제와 대등한 조건을 구비할 수 있었다. 셋째, 전술 이동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불필요한 교전이나 비전투 손실 없이 왕성한 사기와 제대의 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넷째,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형과 적의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작전계획을 적용했다.

김 관장은 “지금까지 진행돼 온 청산리 대첩을 영웅적 신화로 부각시키는 작업들이 오히려 독립군의 용전에 대한 학술적 군사적 접근에 한계로 작용했다”고 말하고 “독립군의 전술적 분석을 통한 상황의 이해는 독립운동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데, 양병의 수준과 전술적 분석은 당시의 여건과 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킬 것이다. 또 의병식 감성적 항일이 아니라 당대 선진군사학을 바탕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했음을 밝히는 작업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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