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마다 저희 부모님 댁을 방문해주시는 고마운 분이 계십니다. 오전 9시면 어김없이 도착해 부모님의 말벗도 되어주시고 병원 길에 동행도 해주시는 보훈도우미 박진순님이십니다.그분은 아들, 딸 모두 분가하고 어르신 두 분만 계시는 적적한 집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혈압 체크와 혈당 체크, 때로는 물리치료까지 병행해 주시며 건강도우미 역할도 해주십니다.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가끔 오는 딸보다도 더 친하다고 하네요.봄이면 부모님을 본인 차로 모시고 꽃구경도 다녀오고 근무하는 날이 아님에도 지나는 길에 들렀다 하며 안부를 물어 주시
4~5월부터 무지개가 피어나는 계절이다. 그런데 무지개를 도시에서는 볼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서울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이 자연시간에 무지개를 설명하고 무지개를 본 학생은 손들어 보라 했더니 단 두 명만이 손을 들더라고 한다. 무지개는 태양의 반대쪽에 생기는 일곱 색깔의 아름다운 원호로 태양의 반대쪽에 비가 내릴 경우 물방울에 비친 태양광선이 물방울 안에서 반사·굴절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지개는 이와 같이 대기 가운데 머물고 있는 물방울을 지나오는 햇빛이 분산하여 일곱 가지 고운 빛의 활 모양, 길게 둥근 다리 현상의
이 세상은 홀로 이루지 못할 일이 많다. 찢기고 넘어지고 좌절하며 희망을 잃고 헤맬 때 이 굴곡 많은 인생의 고단한 사건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우리가 ‘혼자’가 아닌 ‘함께’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위치에서, 내가 너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상대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일들, 즉 네가 내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며, 사실 위대한 세계의 거장들은 모두 이러한 가치의 삶 때문이다. 어느 날 귀족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커녕 물
갈수록 고향의 정이 넘쳐나던 옛집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고향 근처를 지나칠 때는 언제나 옛 마을을 찾곤 합니다.어릴 적 고향의 향수를 못 잊어 언제나 고향 꿈을 꿀 때에는 항상 나는 어린 시절이고 뛰어놀던 골목과 동리 앞 느티나무 아래 모래 덤들이며, 안산 기슭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는 가 봅니다. 평생토록 이런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내 평생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던 지난 17년 전. 암에 걸려 생존율 3%의 긴 암흑 같은 삶의 터널에서 살아남은 내가 덤으로 사는 산수(傘壽)를 훨
다사다난했던 갑오년 한해도 끝자락에 와 있다. 월력의 마지막 장이 애처롭게 보인다. 한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일까. 첫눈이 오고 추위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온 몸이 움츠러지는 오늘이다.나이가 들면 겨울과 함께 인생의 고통도 더 심해지는 법이다. 어디서 오는지 뼈저린 고독이 더해진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까운 이웃과의 따뜻한 대화, 편안한 나눔이 삶의 명약이 된다.우리 인생이란 타인의 삶과 얽혀진 연결고리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혼자 살수는 없다. 외로움 속에서 하루해를 보내고 아침에 뜨는 해와 함께 또 하루를 기약 없이 혼자
우리 6·25참전 전우들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의 피땀이 스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한·미 연합전력이 한반도 전쟁예방에 계속 그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이번에 정부가 논란의 와중에 있던 전시작전권(전작권)을 현행 체제로 계속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하니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 전우 모두는 그동안 너무도 답답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우리 역사에서 국방에 관한 중요정책을 논의할 때 국가이익보다는 분파적 세력 확장에 치중하여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불행하게도 나쁜 방향으로 결정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그로 인해 모진 전란에 휩쓸
저는 어린 시절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또래들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습니다.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독학을 하였습니다. 빈곤을 겪으면서 세월이 흘러 청년기가 되어 병역의무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습니다.고된 훈련을 받고 실무에 배치, 의장대에 차출되어 훈련을 받던 중 월남 청룡부대에 지원하여 전쟁터에 참전하여 매복 정찰 등 많은 전투를 하였습니다.특수전투임무가 끝나고 귀국해 고향에 돌아와서 결혼하고 생업에 열중하면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생업에 동분서
‘책을 읽는 것’을 독서라 하고 ‘그림을 읽는 것’을 독화(讀畵)라 한다. 그러나 요즘 독화라는 말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그림을 통해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화가의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감상이자 독화일 것이다.사회적으로도 요즘은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문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아지고 있다. 한 평생 문인화를 해온 나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첨단 정보기기들이 늘어난 지금의 사회는 진지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보다는 시각적인 자극에만 치중하고 최신의 정보를 중시하기
지난 해 아내를 하늘로 보내고 홀로 지내는 참전유공자입니다.혼자 살고 있다 보니 무척이나 외롭고 슬픈데 그럴 때 마다 문자 메시지로 위로의 말을 보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부산지방보훈청 한명선 보훈섬김이님입니다.매주 찾아와 가사일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가 걷기가 힘든 것을 알고는 무릎보호대를 구해주시기도 하고, 지난해 덮었던 겨울이불을 빨아 겨울 준비를 미리 해주시기도 합니다.한명선 섬김이님 덕분에 저 같은 독거노인이 살맛이 납니다.오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보훈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전립선암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얘기처럼 광복 60여 년을 가까이하는 우리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대한민국의 후진 탈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동분서주 땀을 흘리고 달려온 우리는 이제 기적같은 경제 성장으로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됐다.하지만 선량한 우리 민족을 강제로 혹사하고 재산을 강탈하고, 애국지사를 투옥 또는 학살했던 인간 이하의 만행을 자행한 일본은 아직도 그들의 2세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왜곡해 우리를 격분케 하고 있다.게다가 왜곡 교과서의 내용을 시정한다는 약속을 해놓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너덧 가지만 너절히 수정하고 나갔으니 그
우리나라의 유력 정치인들이 ‘상징정치’의 무대로 애용하는 곳은 국립현충원이다.그러나 지금까지도 6·25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우리나라 각 대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 참전자들의 경우 그 숫자나 이름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많은 선진국 명문 대학의 경우는 어떨까.일반적으로 선진국일수록 그들의 조국을 지키는 전쟁을 기념하는데 열심이며, 대학 또한 이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있다.영국인들이 전사하면 마을 한복판 위령비는 물론이고 그가 다녔던 교회나 기업·병원·학교 등에도 어떤 형태로든 당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는다.그 중 가장
선비는 ‘지난날 학식은 있으나 벼슬은 하지 않은 사람 또는 학덕을 갖춘 이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이 말은 우리말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 또는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어떻게 하면 선비라 할 수 있습니까” 물으니 “선하고 권면하고 화평한 모습을 가져야 선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내가 사는 고향은 우리나라 선비정신의 발원지이자 선비정신 계승의 중심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소수서원은 1542년 중종37년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백화점에서는 세일행사를 자주하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전단지가 날아든다. 50%세일은 보통이고 더러는 70~80%로 방매하는 경우도 있다.얼마 전의 일이었다. 유수한 백화점 행사 첫날, 아내는 나에게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답답하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바람도 쐴 겸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그리하여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그날은 마침 공휴일이어서인지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의류코너에서였다. 아내는 대뜸 봄 스웨터를 두 벌씩이나 골랐다. 두 벌이라고 해도 한 벌 값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왜 이렇게 가격이 저렴하느냐고 묻
금년 여름엔 유난히 소낙기성 비가 자주 내렸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면 하늘은 금세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폭음을 동반한 소나기가 전시체제의 비상경보처럼 내렸다.나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소나기가 꿈 많은 청소년들의 것이라면 지리한 장맛비는 허리 굽은 노인들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우비는 깜직한 소녀들의 것이라면 안개비는 홀로된 여인의 한숨과도 같은 비가 아닐까.어떤 연유에서 나의 머릿속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는 농촌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내리는 여러 가지 유형의 비를 보
이번 주에도 두 장의 복권을 샀다. 이번 주 뿐만이 아니다. 나의 지갑 속에는 몇 푼의 용돈과 함께 항시 복권이 한두 장 쯤은 들어 있다. 벌써 십 년도 넘었을 것이다. 매주 두 장을 매입한다고 할 때 로또의 경우 한 달이면 사 만원, 일 년이면 사십 팔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수치에 개의치 않는다. 복권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권 추첨일이 임박한 시간에 복권을 사서 지갑에 넣고 거리를 활보해 보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그와 반대인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왔다. 우리나라 주변 열강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남북간의 체제와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 가혹하게도 치러야 했던 동족상잔 6·25 전쟁이 발발했던 달이다.이 참혹한 전쟁은 남북한 및 참전 외국인까지 합쳐 530여 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고, 무려 1,000만 명을 이산가족으로 만들고 말았다. 백의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이 골육상쟁의 전쟁은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주는 이 민족 최대의 비극이기만 하다.몇 해 전, 우리의
집 앞에 핀 벚꽃이 죄다 떨어졌다. 봄 내음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마치 여름이 뜨거운 총칼을 들고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듯 봄이 도망치려한다. 나와 아내는 두꺼운 이불을 넣어두고 여름옷을 꺼내며 남들보다 조금 일찍 여름 맞을 채비를 했다.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내는데 그 뒤로 시커먼 박스 하나가 ‘툭’ 떨어졌다. 45년 전 내 군 생활 추억이 담긴 박스였다. 방으로 가져와 몇 년 만에 박스를 열었다. 해병대의 상징 붉은 명찰과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군번줄까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볕이 좋은 날이면 희석이 할아버지는 골목길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면 희석이는 곧장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곳까지 전력 질주를 하여 달려갔다. 희석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희석이는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희석이는 동네 친구들끼리 전쟁놀이를 할 때면 멋진 목각 총과 칼을 가지고 나왔다. 희석이의 장난감은 모두 할아버지 작품이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칼 하나로 뚝딱뚝딱 장난감을 만들었다. 희석이는 할아버지가 만
가칠봉은 6·25전쟁 당시 가칠봉지구 전투로 유명한 격전지입니다. 국군은 북한군과의 일진일퇴의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과 수많은 희생 끝에 백두대간과 해안면 등 전술적 요충지를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휴전 후, 김일성이 가칠봉을 확보하지 못해 3일 동안 대성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중요한 곳입니다.저는 군생활 중 가칠봉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뭐 하러 사서 고생하느냐?” “나 대신 올라가줘서 고맙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칠봉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들었던 소문만큼 가칠봉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나는 충북 단양의 수양개 마을에서 사과농사를 지으면서 60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단면을 그린 벽화를 보기위해 그곳에 있는 선사유물전시관을 자주 찾았다. 전시관 출입구 벽에 그려진 벽화는 남한강 상류 강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돌망치, 주먹도끼, 주먹칼 등 석기시대 연장으로 물고기와 조개 등을 잡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맨발에 아랫도리만 가린 맨 몸이고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과 어깨 등의 뼈에는 살이 별로 붙지 않은 앙상한 모습이다.물론 당시는 문명생활 이전이었기 때문에 입을 옷도 없었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