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울마저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1951년 4월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대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800여 명은 중공군 3개 주력사단 4만 2,000명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발이 3일 동안 묶였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중 41명의 전우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장군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 직후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동경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를 듣고 곧바로 ‘나는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와 함께 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명장이었다. 그의 아들 지미 밴 플리트 2세도 6·25전쟁에 자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
전덕기 선생은 17세 되던 해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결정적 전환기를 맞았다.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세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해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했고, 1902년에 정식으로 전도사가 됐다.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해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
“청하건대,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1951년 5월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 당시 용문산은 아군의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북으로 향한 진격요선이자 남으로는 방어를 위한 기지로서 작전상 양보할 수 없는 피아간의 쟁탈 초점이었다. 중공군의 계속된 투입으로 분전과 혼전은 종일토록 계속됐지만 아군은 계속 진지에서 물러나질 않았다. 계속된 적군의 공격으로 밀고 밀리는 전투 속에서 353고지가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으며, 치열한 전투로 통신이 끊겨 제3대대는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제2연대에서는 제3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자
189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우리 민족의 공분을 불러 일으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구연영 선생이 참여한 남한산성의진(이천수창의소)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되어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 달 이상 점거해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 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 이끌었다. 을미의병의 쾌거였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해산한 후 김하락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에서 영남의병과
1952년 1월 중순 6·25전쟁 당시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에 위치해 막대한 군수물자를 만주와 평양을 거쳐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미 제5공군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승호리철교 폭격작전을 36회에 걸쳐 계획하고 출격했으나, 실패만을 거듭한 후 대한민국 공군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당시 대한민국 공군은 1950년 7월 2일 최초로 F-51 전폭기 10대를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지원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52년 초까지 단지 15대의 전폭기로 작전에 임하
김도현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영양지역 유생들과 의병을 일으킬 일을 논의했으며, 이듬해 2월 청량산에서 의병진용을 편성해 무기를 조달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선생은 의병부대의 통합을 시도해 자신의 부대를 예안의 의병부대인 선성의진에 합류시켜 중군장을 맡게 됐고, 경북지역 7개 의병부대의 대표들과 함께 회맹의식을 갖고 승리를 기원했다. 1896년 3월 연합의진은 상주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1896년 6월에는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진과 연합, 강릉 대공산성
신철수 공군소령은 1926년 일본에서 출생, 항공기에 대한 남다른 동경심으로 산이항공기 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징집돼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에서 조종과정을 수료했다.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 신철수 소령은 1949년 항공병 제1기로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 입대해 조종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6·25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간부후보생 8기 과정에 입교해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신철수 소령은 1951년 10월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 편대장으로 유엔 공군과 협동작전이 아닌 한국 공군 단
원심창 선생은 1920년 서울 중동학교를 중퇴 후 1923년 일본 도쿄 니혼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 선생은 1924년 일본의 신진 유학생과 함께 흑우회를 재건하고, 1926년 흑색운동사를 설립해 기관지 ‘흑우’ 등을 간행했으며,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바꿔 일본의 전국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어 1927년 흑풍회로 개칭, 이듬해 흑우연맹으로 확대·개편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대립해 항일투쟁은 물론 반공산주의 활동과 선전활동,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10월부터
노병대 선생은 1882년 조선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사를 모집해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했고,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해 진사 허운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론에 입각해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활동했다.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선생은 고종황제로부터 밀조를 받아 거사를 계획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강년 의진에 좌종사로 참여했다. 선생은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임용헌, 충남 연산군에 사
고태문 육군대위는 1951년 8월 24일 제11사단 제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복무시 펀치볼 동부의 88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고 대위는 1952년 11월 제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351고지를 점령, 방어하던 중 적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공격은 다행히 방어했으나 재차 공격해 온 적의 방어에는 실패해 곤경에 처했다.그러나 고태문 대위가 이끄는 중대는 죽고 사는 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피의 살육전 끝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마침내 적을 격퇴시켰다.이처럼 고태문 대위의 과감한 육탄공격
6·25전쟁 발발 초반에 오산 죽미령에서 미국 스미스 기동대가 북한에 참패한 이후, 24보병사단장 딘 소장은 그 전말을 들은 후에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딘 소장은 여전히 34보병연대가 평택-안성 축선에 방어선을 설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의 부대들은 훈련과 장비 부족을 비롯해 전투력이 총체적으로 저하되었음에도 딘 장군은 일선 부대들이 임무수행을 완벽하게 수행하리라고 본 것이다.1950년 7월 7일 34연대 작전장교인 존 던 소령은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북진 중인 예하 3대대
이성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당시 선천읍에 위치해 있던 선천면사무소 공격 방화사건을 주도했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보안법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7년 6월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병보석을 얻어 1923년 5월 형집행정지 석방되자 이를 이용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망명 후 1923년 9월 상해 독립신문사에 입사한 선생은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일제에 항거하기로 결심하고 1926년 1월 병인의용대에 참여했다. 선생은 강창제, 김창근 등 병인의용대원과 함께 상해 일본총영사관을
1919년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구 서울역 광장)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민의 자주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왈우(曰遇) 강우규의사 의거 94주년 기념식’이 2일 오전 의거현장인 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 기념사업회원, 시민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강우규의사(1855.7.14~1920.11.29)는 평남 덕천에서 출생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
차일혁 경무관은 1920년 남한 유일의 발전소인 칠보발전소 탈환과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사건을 총 지휘했다. 1951년 1월 칠보 발전소 전투가 발생, 6·25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빨치산 2,000여명이 발전소를 포위했다. 남한 유일의 전기를 수급하는 수력발전소인 칠보발전소가 속수무책으로 적의 손에 넘어갔을 때 18전투대대장인 차일혁 경무관(당시 총경)은 망설임 없이 75명의 병력을 이끌고 50여일 간 생사를 초월한 전투로 빨치산을 격퇴하고 칠보발전소를 탈환했다.6ㆍ25전쟁 정전이 체결된 이후에
황학수 선생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해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했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당시, 경북일대의 의병진압 명령을 받은 선생은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의 사살을 막고 체포 후 모두 석방 조치했다.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했고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다수가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망명을 결심, 1919년 3․1운동
김재옥 교사는 1950년 5월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뒤인 6월 20일 충주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그러나 부임 5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김 교사는 동락초등학교에 머물며 학교를 지켰다.1950년 7월, 북한군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이 파견됐지만 전세는 달라지지 않았고, 북한군은 음성군 무극리까지 점령해 내려왔다.충주방면으로 진출하던 북한군은 7월 6일 동락초등학교에 이르러 무기와 탱크를 학교 교정에 집결해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당시 국군은 지연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국군 7연대가 음성 북쪽에서
강영소 선생은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 선생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해 에와농장에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했다.1910년 10월에는 미주 본토에서 신한민보사의 총무원으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재무와 중앙총회의 서기, 지방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1913년 5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돼 총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총회에서 직접 관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자격으로 처음 내한해 ‘사민필지’라는 세계지리서를 펴내는 등 한국청년에게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했다.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했다.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에 한국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해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헐버트 박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김창학 해군 하사는 1948년 6월 해군 신병 제10기로 입대해 제1함대 701함 조타수로 복무했으며, 6․25전쟁 당일 대한해협 해전에 참전했다.1950년 6월 25일 김창학 해군 하사가 탑승한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에서 병력 600여 명과 탄약 및 식량을 가득 싣고 남하중인 1,000톤 급의 북한 무장선박을 발견했다. 백두산함은 북한의 무장선박을 저지하기 위해 4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며 6월 26일 새벽 부산 동남방 11마일 해상에서 이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김창학 하사는 이 교전에서 적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