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 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산간 지방에 첫 얼음이 얼었다는 기상 보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빛이 푸른 물감을 짙게 뿌려 놓은 듯싶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 갓 물들기 시작한 자색의 벚나무들, 진분홍색 옷으로 치장을 한 단풍나무, 주황색의 느티나무, 백발의 억새꽃, 소슬바람에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들녘.

도심을 벗어나 쭉 뻗은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들이 멀리서 보니 쌍무지개가 땅에 내려와 얕게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색색으로 갓 물들인 잎을 쫙 펼쳐놓고 가을 금빛 햇살에 말리는 듯싶기도 하다.

밭둑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감나무는 벌써 두텁게 드리웠던 녹색 옷을 반쯤 벗어 붉은 속살을 겸연쩍게 내 놓고 있다. 길옆 과수원 사과나무는 수없이 매달린 열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져 있다.

누군가 소리친다. “저 사과 좀 봐! 가지가 찢어질 것 만 같아.”

불긋불긋 익어가는 탐스런 사과가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한 개의 사과 열매!

오늘 저렇게 영글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비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른 봄날 갑자기 몰아닥친 꽃샘추위에 여린 꽃망울이 얼어버려 열매 맺기는커녕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져버린 것도 있고, 열매를 맺기는 했어도 솎음으로 따낸 것도 있고, 익기 전에 병충해를 입거나 까막까치가 파먹어 낙과된 것도 있고, 거의 익어갈 무렵 폭풍우가 몰아쳐 떨어져 버린 것도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과일나무 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커멓게 썩어버린 열매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렇다! 탐스럽게 익은 한 개의 과일도 저절로 열린 것이 아니다.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저렇게 영글기까지 작은 열매가 겪어야 했던 시련들, 그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었기에 오늘, 저토록 화려한 몸짓으로 가을의 금빛 햇살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음이 아닌가!

시련을 이겨낸 승리자의 영광스런 훈장이요, 아름다운 결정체요, 환희의 찬가이다.

이런 자연의 이치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풍요 속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요즈음의 젊은 세대는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스스로 주저앉거나 꺾이고 만다. 성숙하기도 전에 낙과가 되어 버린다.

어른의 보호막을 걷어도 혼자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어려움으로 허우적거릴 때 차분히 옆에서 지켜보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스스로 극복하는 지혜를 배우게. 그래서 영근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가을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웠는데도 오늘 따라 가을볕이 유난히 따사롭다.

시련을 극복한 자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리려는 듯이.

 

이태봉(참전유공자, 전 충남여자고등학교장. 대전에 살며 수필문단에 등단하여 수필가로서 창작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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