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을 보내는 가운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태봉 선생님이세요? 저는 D여고 44기 졸업생 동기회장을 맡은 아무개입니다. 저희가 졸업한지 30년을 기념해 선생님들을 모시고 다음 달 첫째 주 토요일에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잊지 마시고 꼭 참석해주세요.”

전화를 받은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아침 일찍 학교에 출근하니 교무실 내 책상 위에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접은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학, 딱지, 고깔 모양에 저고리처럼 생긴 것도 있다. 은박지로 접은 천 마리 종이학도 유리 상자 속에 날갯짓을 하고 바로 옆에는 꽃다발도 놓여있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 교실의 출입문을 열자 아이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평상시와 다른 행동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아이들이 손짓하는 칠판을 보니 ‘Happy Birthday to You. 멋쟁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이라 적혀있다.

아이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힘차게 불러줬다. 언제 준비했는지 케이크도 교탁위에 놓여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주문이 들어왔다.

“선생님, 야자타임 해도 되요?” 분위기로 봐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지 뭐.”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대뜸 한 아이가 일어나더니, “이태봉! 너 도대체 몇 살 때 여자를 만난거야?” 한다.

당돌한 질문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꿈속에서 “너 아무개지!” 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잠이 깼다. 그때 받은 편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수업이 끝나고 한가할 때 아이들의 쪽지 편지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편지 속에 담긴 사연을 읽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학창시절은 늘 그리움으로 채색된다. 하늘을 찌를 듯이 구김 없이 자란 나무들이 즐비한 교정, 정든 교실, 다정했던 친구들, 언 손을 녹여주시던 선생님….

꿈 많던 여고 시절, 작은 도랑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큰 강물로 흘러 창해에 이르듯 그들의 작은 소망들이 끝없이 펼쳐져 무지개를 타고 밤하늘에 영롱한 별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세월이 흐르면 한 폭의 수채화가 돼 추억으로 남는다.

30여 년 세월의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채움과 비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인생에서 그들은 자신의 곳간에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웠을까?

채우는 기쁨과 비우는 아픔을 수없이 겪으면서 쌓인 내공이 그들의 옷차림, 눈빛, 몸짓, 언어의 무늬에 고스란히 남아 그 사람의 깊이가 드러나겠지.

늦가을 무서리를 맞고도 함초롬히 피어난 들국화처럼 파란곡절의 인생을 달관한 누님의 얼굴로, 이른 봄 꽃샘추위에도 꽃망울을 지켜내어 화창한 봄날 피어난 목련꽃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그들은 나타나겠지.

이태봉(참전유공자. 전 충남여자고등학교장. 대전에 살며 수필문단에 등단하여 수필가로서 창작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