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금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고, 제60회 현충일을 맞았다. 6월을 넘어서며 나라사랑의 마음을 되새겨 본다.

현충일을 보내면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얼을 기리고 추모하는 국민들의 마음이 모아져 광복 이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통일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힘을 모으는 사회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매일 호흡하는 공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처럼 국가안보의 중요성이 점차 퇴색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분단된 지 7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북한은 우리 정부의 진실규명을 애써 외면한 채 동해와 서해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강행하는 무력도발을 거듭하고 있으니 실로 우려스럽다. 우리나라도 이를 제압하기 위한 최첨단 기술 무기들로 무장을 할 수 밖에 없으니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요원한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어른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동네에는 부녀자들과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청소년들이 마을의 치안유지를 위해 소년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이 ‘강화청소년 유격대’이다.

마을마다 소년단 사무실을 만들고 면단위에서 강화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조직이 시 확대되었다. 이때에 지급된 장비가 나무로 깎아 만든 목총(木銃)이었다. 우리는 목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고 경비를 하며 치안유지에 나섰다. 그렇게 목총을 들고 소년단 활동을 한 것은 아득한 옛날도 아닌 65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모양만 장총(長銃)이지 실탄을 쏠 수 없는 거짓 총이고 멜빵도 탄창도 없는 나무작대기에 지나지 않았던 총 아닌 청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국군은 M1소총. 인민군은 속칭 ‘따발총’이 주 무기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가능했던 당시였다. 당시 우리 마을의 소년대장은 나이도 많고 군사훈련을 받는 경험이 있어 목총을 들고 훈련을 열심히 시켰다. 행군도 하고 각개전투 훈련까지 시키면서 군인정신을 주입시켰다. 뒷산에 아군과 적군의 진지를 만들어 놓고 서로 공격하여 적의 요새를 탈환하는 작전의 전투훈련도 했다. 일종의 놀이 형식이지만 전시 상황을 재연시킨 정신교육이었던 셈이다.

밤이면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있는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야경(夜警)을 돌았다. 야경을 돌 때는 큰 북을 ‘둥둥’ 치면서 마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나는 경비대장 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불침번 당번 조직을 해야 했다. 내 임무를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옛날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후 소년단 활동은 강화에 들어온 인민군 소탕 작전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우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자랑스럽게도 ‘참전유공자’‘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굳건한 국가 안보가 없다면 개인의 영광도, 가정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며 호국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안보의식을 굳건히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한동연(참전유공자, 인천 강화도에 살며 강화문인협회장으로 활발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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