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학(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다.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동강에서 불에 타버린 제너럴셔먼호(1866년) 사건과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강화도를 습격한 신미양요(1871년) 등 미국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이후 일본의 조선병합으로 미국은 조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종결됨으로써 미국과 재회한 대한민국은 미국식 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하면서 정치경제적 부흥을 꾀했으나 공산화통일의 망상에 젖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미 양국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겪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참전기념비의 글귀처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미국은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공산화 일보직전에 있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2년여에 걸친 협상 끝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불완전한 전쟁의 종결이었다.

당시 소련과 중공의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상황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의 철수와 북한군의 재남침을 예상했고, 이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양국은 1882년 5월 22일 조미통상조약을 맺은 지 71년 만에 자유와 평화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동맹관계를 맺게 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는 제도적 보장장치였다. 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미 양국은 무력침공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강화하며(2조), 당사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할 경우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하며(3조), 미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4조)를 약속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한 한미동맹은 지난 60여 년 간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을 성공적으로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부흥시켜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한반도 차원을 넘어서 동북아와 아태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데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먼저, 서부전선에 전진 배치된 주한미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함으로써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팀스피리트와 키리졸브, 을지프리덤가디언(UFG) 등 다양한 한미연합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향상하는데 기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1968년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1983년 버마의 ‘아웅산묘소 테러사건’, 동해 잠수정 침투사건,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각종 도발로 촉발된 위기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다.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군사령부(CFC)는 유엔군사령부를 대신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와 위기관리 등 한국 방어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둘째, 한미동맹은 한국군의 자주국방을 지원했다.

미국의 군사지원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식 군사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군 근대화의 발판을 구축하였으며, 각종 무상 및 유상 원조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지원했다. 1950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은 54억7,000만 달러의 무상군원(MAP)과 1억7,000만 달러의 국제군사교육훈련(IMET)을 제공했으며, 50억5,000만 달러의 유상군원, 14억5,000만 달러의 상용판매, 23억5,000만 달러의 FMS 차관을 제공해 한국군의 자주국방을 지원했다. 한국군의 능력이 증대함에 따라 1992년 평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에 이양됐고, 북한의 핵위협이 사라질 경우 전시작전통제권도 한국에 전환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과거 주한미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한국의 방위는 이제 한국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주한미군이 지원역할을 수행하는 관계로 변화되고 있다.

셋째, 한미동맹은 한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는 초석이 됐다.

미국의 전후 복구지원과 무상원조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됐으며,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안정적 안보환경을 유지해 대한민국의 국제교역 및 외국인 투자를 보장함으로써 수출입국(輸出立國)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주한미군의 주둔은 우리의 안보비용을 절감하게 하여 경제발전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을 제공했다.

넷째, 한미동맹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미동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가치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킴으로써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선진화된 민주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제공했다.

또한 활발한 교류협력사업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발굴•육성했으며,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세계화와 국제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 한미동맹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점과 갈등요인이 잠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한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일부의 비판적 시각도 있다. 지난 2002년 주한미군의 전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반미 촛불시위는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에 위기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주한미군으로 인한 기지촌 주변의 범죄와 주한미군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둘러싼 불평등성, 기지 주변의 각종 소음 및 공해로 인한 반한감정, 전작권 전환 및 방위비분담 등은 앞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세계적 금융위기와 미국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로 인해 미국의 세계경찰 역할은 축소되고 있는 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한 중국의 군사력 증강은 아태지역에서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에 더하여 북한의 핵위협과 군사도발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내외적 도전에 직면하여 우리는 굳건한 안보를 확고히 유지해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제 태평양전쟁 종전 70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한미동맹의 역사를 열어나가야 한다. 상호 이해와 신뢰, 그리고 호혜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균형적 역할분담과 협력의 원칙에 기초하여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미동맹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최근 신문 PDF보기 ◆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