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초월 선생은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해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친 후 교종의 최고 단계인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여타 종교에서는 3·1운동에 적극 가담한데 반해 불교계가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진관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을 돌며 항일 이념인 일심교를 전파했다.

선생은 중앙학림(현 동국대)내 한국민단본부를 설치해 상해 임시정부 및 독립군에게 제공할 자금을 모금했다.

선생은 1919년 단군 건국일을 기념하고 1920년 일본 3·1운동 1주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고문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선생은 여러 차례 체포됐으나 미치광이 행세로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

이후 1920년 승려독립선언서와 의용승군제 추진을 통해 불교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용산역을 군인 및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이에 선생은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격문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을 비롯한 일심회 회원 등 80여명도 체포 구금됐다.선생은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하다 체포돼 청주교도소에 투옥됐으며 1944년 6월 29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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