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상복 목포대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
대부분의 나라들이 보훈을 국가적 과제로 삼아 여러 정책을 기획하고 실천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국가보훈처의 업무 영역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국가 보훈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보훈정책은 유공자와 유족을 위한 물질적?심리적 보상과 위안의 제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훈정책을 좀 더 확장된 의미로 살펴봐야 하는데, 직접적인 보상과 위안의 대상이 아닌 국민들을 향하는 보훈이 있다. 그와 같은 보훈정책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국민들이 보훈의 가치와 정신성을 공유하고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상징적 보훈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일은 인류학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근대국가라는 매우 독특한 양식 속에서 보훈의 의미를 추출해볼 수 있다. 국민국가로 불리는 근대국가는 전통국가의 군주나 황제처럼 인격적 실체에 토대를 두는 정치체가 아니다.

그 국가는 자유, 민주, 평등 등 정치이념 위에 성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으로 불리는 집단적 관념이다. 국민은 특정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국가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근대헌법은 국가의 정치적 주인이 국민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통국가와 마찬가지로 근대국가 또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충성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충성과 희생의 정서는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국민들의 동의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충성과 희생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가는 충성과 희생을 치른 국민들을 위한 물질적·심리적 보상과 위로를 제공해야 한다. 그 방향의 핵심에는 국가의 주인이 바로 국민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일이 자리한다.

만약 국가가 유공자들을 방기한다면 헌법에 기록된, 국가의 주권자가 국민이라는 가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국가는 그와 같은 의지를 다른 국민들에게도 전달해야 한다. 그 위에서 국가는 충성과 희생의 가치를 확보할 수 있고 국가적 안정과 통합을 꾀할 수 있다.

서유럽이 전통에서 근대로의 정치적 변동을 겪는 과정에서 ‘애국’과 ‘애국주의’(patriotism)는 국민들이 인식하고 공유해야 할 매우 중요한 가치로 정립되어 왔다. 영국과 프랑스의 많은 정치사상가들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국가 아래에서는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과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것은 사적인 이익을 버리고 공적인 이익을 취하는 덕성을 의미하며, 전통적인 국가에서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적 위치에 의해 부과되는 국가적 의무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 점에서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애국심을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에 대한 끊임없는 선호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루소는 ‘열렬한 조국애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씩씩한 국민들’을 상상했다.

우리나라 보훈의 가치는 ‘독립, 호국, 민주’다. 보훈을 대외적 위협에 맞선 싸움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일 테지만 보훈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한국적 보훈의 가치도 보편성과 특수성의 귀결로 이해해야 한다.

유공자들과 그 유족들을 깊이 위로하고, 국민들을 공동체 내로 통합해내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한국의 보훈은 ‘독립, 호국, 민주’의 가치 위에서 다양한 정책들을 실천해내야 한다.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근대국가가 수행한 것처럼, 보훈은 무엇보다 애국의 전범이 되는 인물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어내도록 해야 한다.

이미 확립된 애국의 국가적 모델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있고, 또 밝혀지지 않은 인물도 있다. 보훈정책은 국민적 차원에서 보편적으로 존경받고 추앙받을 수 있는 애국적 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한층 더 심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또한 보훈정책은 애국적 영웅과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가치를 일상 문화 속에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폭 넓게 진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보훈정책의 제도적 공간인 국립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국립묘지는 보훈정책의 주요한 영역들이 교차하고 밀접하게 연결되는 중대 장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국립묘지는 국가적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들을 영웅성의 가치와 연결하는 터전이며, 살아 있는 국민들에게 보훈의 이념과 정당성을 일상적 차원에서 널리 확산하는 상징의 전당이라는 말이다.

그 점에서 국립묘지는 핵심적인 보훈정책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위로, 공감, 정당한 희생, 애국과 같은 가치들을 만들고 확산하는 장소로서 국립묘지 제도에 대한 깊은 학문적 연구와 정책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중요한 사실은 애국주의를 창출하기 위한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반드시 전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보훈정책의 바탕에는 애국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관점들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수렴하는 일이 깔려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적 공동체를 견인해 나갈 힘도, 위기 시에 그 공동체를 위해 애국적 희생의 덕성을 주조할 동력도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보훈정책은 결국 민주적 소통의 관점을 토대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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