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흔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시계와 달력을 보고 같은 시간대에 뉴스를 듣다 보니 누구나 동일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다. 시간은 시각, 청각, 촉각 등 인간의 감각기관이 포착한 어떤 대상이 특정 지점 사이에 변화한 정도를 일컫는 말이다. 시간은 사실상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문제이다. 시간이라는 객관적 실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만지며 느끼고 해석하는 경험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른 만큼 여러 주관적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과거를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만큼 인식하며 그만큼만 그에게 유의미한 과거가 된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반드시 같은 역사적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보훈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가져다준다.

다른 기억들을 조화시키다

보훈은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대한 보답이자 이를 통해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이다. 이때의 희생과 공헌은 독립, 호국, 민주, 국민보호에 기여한 정도를 기준으로 하며, 그 최종 목적은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에 있다(‘국가보훈기본법’ 제1·2·3조 요약). 우리는 언제나 이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살듯 독립, 호국, 민주, 국민보호의 정신과 가치에 대해 전 국민이 동일한 입장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 호국, 민주, 국민보호의 가치를 너무 협소하게만 받아들이면 관련 정신과 가치가 서로 충돌하면서 도리어 국민통합을 저해할 수도 있다. 가령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지만 사상적으로 친북적이어서 유공자가 되지 못하는가 하면, 한때는 친일적이었지만 해방 후 반공적 자세로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는 데 기여해 유공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독립과 호국의 가치 중에 호국을 더 우선하는 사례이다.

때로 ‘호국’과 ‘민주’의 정신이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민주를 넓게 해석하면서 통일과 평화 지향성을 가지고 대북 포용적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민주를 반사회주의 내지 반공산주의 차원에서 좁게 해석해 적대적 대북관을 갖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이곳에서 민주의 이름으로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게 될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때 국가 혹은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국가는 민주에 대한 통합적 논리와 가치를 확보하고 확산시켜 민주의 이름으로 다른 가치와 충돌하는 사례를 줄여가야 한다. 가능한 여러 입장들 간에 공유 지점을 확보하고 이를 확장시켜 국민통합에 기여해야 한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비슷한 생각과 정서들이 공통의 기억을 전승하고 연대를 만들어내면서 비슷한 미래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연대가 타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언제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로 그렇게 해야 한다.

미래는 아직[未] 오지 않은[來] 것이 아니라, 지금 과거를 기억하고 기대하는 만큼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훈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별도의 새삼스러운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보훈의 본래적 가치에 충실하면 미래도 자연스럽게 앞당겨진다고 할 것이다.

국제보훈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국제보훈을 더욱 확장시켜야 한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국가보훈처는 이를 위해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2020)을 제정한 바 있다. 한국전쟁 참전국과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와 선양, 후손들과의 연계 강화, 현충시설 관리 등도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 참전국과의 교류협력도 미국 중심에서 필리핀, 남아공, 터키 등으로 확대해가는 추세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이제 해외 순방 중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며 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1년 6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한국전쟁 명예훈장 수여식을 열었고, 9월 22일에는 문대통령이 하와이로 직접 가서 타계한 애국지사 2인의 후손에게 국가유공자 훈장을 추서하는 등 해외 독립유공자를 적극 발굴하고 서훈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보훈의 미래가 국내를 넘어 국제로 나아가는 데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제보훈 분야의 확장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한국의 보훈 정책을 형성시킨 계기 속에 이미 국제적 차원이 들어있다. 한국의 보훈 자체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항거 중에, ‘북한’ 및 ‘중국’과의 전쟁 중에, ‘베트남’전 참전 중에 겪은 각종 희생과 상처에 대한 보답 아니던가. 한국의 보훈 정책 자체가 이미 국제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독립을 도와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외국인들도 여러 명이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중국의 지도자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는 물론 스코필드(Frank W. Scofiel), 헐버트(Homer B. Hulbert) 등은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독립유공자들이다. 그 외에도 해외 유공자들이 많다. 일본인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설령 한국에 건너와 몸소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식민지 정책을 성토했던 평화주의자들이 많았다.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등 많은 이들이 일본 안에서 일제의 한국 및 중국 침략과 전쟁을 전면 비판하고 평화운동을 벌였다. 이들을 ‘광의의 독립공로자’로 선정해 물질적 지원은 아니더라도 정신적 선양의 필요성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적극적 노력을 통해 한국 역사와 이들 공로자 간의 관계성이 긴밀해지고,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반한 미래의 보훈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도 국제성이 들어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전쟁을 동족상잔의 내전처럼 여겨져 온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은 전형적인 국제전이었다. 그것은 북·중·러, 한·미·일 등 국가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대립 구도에서 발단됐고, 크게 보면 일종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같은 복잡한 정치 지형 안에서 발생했다. 이런 지형에서 16개국 이상이 한국전에 참여했고(의료지원국 6개국 별도) 미국, 러시아(옛 소련), 중국, 일본 등 한국의 영토적·이념적 분단에 관여한 국가도 여럿이다. 한국 방어에 도움을 준 국가와 참전용사에 보답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것은 보훈의 미래를 위해서도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다.

진영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이때 한국전 참전국에 대한 지원이 자칫 더 큰 진영대립 혹은 ‘대분단체제’를 연장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전쟁의 일차적 당사국이었던 중국, 베트남은 물론 한국전쟁에서 정책적으로 북한을 지원했던 러시아(당시 소련)와는 진작에 수교했고 자유로운 여행과 천문학적 규모의 교역도 하는 상황이다. 가장 치열하게 전쟁하며 수백만의 사상자를 낳았던 북한과도 대화를 모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훈이 참전국끼리의 우의에만 골몰하면 이념적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보훈이 미래의 것이 되려면 보훈의 이름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잠재우거나 없애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진영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세계는 이미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어 있다. 적어도 정보와 소통에서는 지역 간 물리적 거리가 거의 없어지고 ‘하나의 마을’처럼 됐다. 보훈이 이러한 현재적 상황에 충실하다면 보훈의 미래도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최근의 ‘메타버스’ 담론에서 보듯, 보훈의 미래도 오프라인 못지않게 온라인에서 더 활성화될 가능성이 크다. 온라인에 국경이 거의 없어진 것처럼 보훈도 국경은 물론 결국은 진영을 넘어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훈이 지속가능해지고 미래가 앞당겨진다.

현재는 미래의 이정표다

물론 미래가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부하고 인식하고 준비한 만큼 다가온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미래는 말 그대로 ‘오고 있는’ 것이지 완전히 도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적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 가능성을 더 구체화하려면 보훈의 논리와 이념에 충실하면서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한 정책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는 한국적 국제보훈의 지향과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21세기 한국보훈의 핵심 기조와 방향인 보편보훈, 통합보훈, 미래보훈, 국제보훈 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언급한 네 가지 핵심 기조는 마치 삼각뿔의 네 면과 같다. ‘보편’은 ‘통합’ ‘미래’ ‘국제’와 통하고, ‘국제’는 ‘보편’ ‘통합’ ‘미래’와 통한다. ‘통합’도 ‘미래’도 어느 하나의 가치와 방향만으로는 확보되지 않는다.

이때 보편적이면서 통합적인 보훈을 위해서는 ‘민주’의 가치가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시대와 상황을 넘어 만능의 지향점은 아니라 하더라도, 전 세계를 놓고 보면 많은 국가들의 여전한 대안이다. 무엇보다 한국만의 독특한 보훈대상자인 ‘민주유공자’는 세계의 민주주의 발전에 유용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외국에는 거의 없는 한국식 ‘민주유공자’ 개념을 민주주의 지향의 저개발 국가에 알림으로써 민주 지향적 시민들 간의 연대의 틀을 국제적으로 다지고, 한국적 보훈의 세계화에 기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보훈은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한편 세계 시민적 차원의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보훈이 인류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하고, 미래를 건강하게 앞당기는 든든한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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