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태평양 너머 먼 곳에 머문다. 2020년 2월 9일,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한국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았다. 아직도 그날의 잔영이 남아 있다. 다시 시선이 안으로 옮겨진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조선어학회의 투쟁을 소재로 한 ‘말모이’라는 영화다.

1929년부터 1942년 4월까지 엄혹했던 시대, 13년에 걸친 노력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위한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극로·최현배·이희승 선생을 비롯한 회원 33명이 피체되었고, 그 중 이윤재·한징 선생 등 두 분은 미결수 상태에서 옥중 순국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에는 재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이 있었다. 건축왕으로 불린 정세권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경제사범으로 몰려 전 재산을 강탈당했다. 사업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이우식 선생은 후원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큰 고초를 겪었다. 어문학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했고, 후원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 Oblige)의 사표로 남았다. 

피지배 민족에서 선진국 대열에 선 유일한 나라, 경제를 넘어 여러 분야에서 경험하고 있는 뛰어난 성취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한 선열들의 노고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선열들이 되찾은 국권 위에서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성취인 동시에 함께 겪은 희생의 축적이다.

보훈은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심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희생한 사람들에게 그 공헌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정신적, 물질적 보답을 통하여 명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하며, 그 희생을 기억과 전승을 통하여 국민정신을 고양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제다. 따라서 보훈에는 국가가 걸어온 발자취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군인과 경찰 외에도 독립유공자, 민주유공자(4·19, 5·18) 등 다양한 유형의 국가유공자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는 국가보훈처(당시 원호처)가 창설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보훈도 달라졌다. 보훈정책은 ‘원호’에서 시작되어 ‘보훈’으로 발전했다. 이제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예우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의료와 복지시설의 대폭적 확충으로 생활권 내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보훈의 성격과 내용도 달라졌다.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고 현창하는 일이 보훈의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국제보훈 활동을 통해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보훈에서 보상과 예우가 달라진 것은 차치해도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정성’이 아닐까 싶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분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예우해드리는 것, 그리고 어두운 곳을 찾아 따뜻한 손길을 펴는 것,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를 다하는 것, 국가유공자의 유해는 지구 어디에서라도 모셔온다는 것, 그런 모습에서 제도적 보답을 넘는 심리적 보답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정부는 발굴 위주의 적극적인 국가유공자 결정시스템을 통하여 최근 4년간 1,856명의 독립유공자를 새로 찾아냈다고 한다. 지금까지 포상인원 1만6,410명의 11%를 점한다. 참전유공자 확인과 등록도 다르지 않다. 정성과 품격을 갖춘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은 유가족은 물론,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에 따라 국가유공자의 자존감과 명예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부족했던 국가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예우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보훈정책의 변화와 국민의 보훈의식 사이에 아직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희망을 갖게 한다.

국가유공자는 질곡의 역사, 엄혹한 시대를 헤쳐온 주인공으로 그 위상이 세워지고 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이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정체성은 내면화되고 동질화되어 지속성을 갖는 가치 정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소속감과 연대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1807년 독일의 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통해 정체성을 ‘독일의 혼’으로 표현했다. 민족의 정신적 동일성을 ‘내적 국경’으로 표현하면서 국가와 국가를 나누는 것은 영토적 국경이 아니라 언어공동체를 기초로 한 ‘정신적 국경’에 있다고 했다.

‘내적 국경’은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서론에서 “교육과 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 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의 ‘국혼(國魂)’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혼(박은식), 한국혼(신규식), 얼(정인보), 낭(신채호), 조선심(문일평), 민족정기(안재홍) 등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강한 민족정신에 희망을 걸었다. 선열들은 사학, 교육, 문예, 언론 등의 사회·문화운동을 통해 겨레의 가슴에 혼을 불어넣었다. 붓을 쟁기로 삼은 ‘필경(筆耕)’이었고, ‘내적 국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외국인의 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글의 우수성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멸망사’ 헌정사에서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정신이 불붙으면 ‘잠은 죽음의 모습’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 하여 한국인의 정신적 기질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마침내 증명됐다.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민족의 활로를 열고 끝내 광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저력은 혼이나 얼로 표현된 민족정신 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를 헤쳐 온 독립정신은 광복 후 자유와 평화로, 민주와 정의의 가치로 강화되고 더욱 풍성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사회라는 뼈아픈 지적이 있다. 그러나 시대적 소명을 다한 국가유공자의 헌신은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서구의 그것과 다른 데가 있다. 지도층뿐 아니라 저변의 역할이 컸다. 평민 의병장에다가 머슴들이 주축이 된 ‘담살이’라 불린 의병부대까지 있었다. 겨레와 역사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전 가족이 만주,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미, 중남미 등지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간 분들도 있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소년소녀, 심지어 권번의 여성들도 있었다. 독립투쟁의 현장에는 어린 여공들도 있었고, 해녀들도 있었다.

필자 나름대로 집계해 보면 부부, 부자, 형제 등 일가친척이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가 120개 가문이 넘는다. 정부 차원에서 정확하게 확인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거나 경찰관에 입직하여 겨레를 위한 봉사를 이어간 분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전사한 분들도 적지 않다. 학도의용군은 의병과 다름이 없다. 두 명 이상 전사자를 낸 경우도 2,000 가구에 이른다. 이 모두 서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관념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강한 민족 정체성과 결합된 것으로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었다.

보훈은 애국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무형의 사회간접자본이다. 국민의 애국심, 정체성, 나아가 국민통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보훈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조화롭고 통합적으로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보훈에 내재된 독립, 호국, 민주의 가치는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각각 다른 빛깔로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올곧음과 밝음을 지향하는 대의정신의 발로였으며, 민족운동사의 큰 물줄기였다.

국가유공자의 정체성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빛바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둘 수 없다. 온 겨레가 가슴으로 온전히 담아내야 한다. ‘기억을 통한 연대’야말로 보훈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다. 내적 통합 속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공동체, 나아가 품격 있는 국가를 실현하는 것은 남은 우리의 몫이다.

김종성 전 국가보훈처 차장

국가보훈처 나라사랑·보훈교육연구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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