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한 달 앞둔 광주, 코로나19로 시내가 다소 한산한 가운데, 여전히 차가운 겨울 기운마저 남아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언제나 상기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이야기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의 이야기들은 곳곳의 사적지에서 세상의 상황과 상관없이 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있었다.

40년 전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도청, 시계탑.

# 5·18민주광장

도청 앞 광장, 분수대, 그리고 넓게 열리는 금남로. 광주의 오월은 도청 앞 분수대의 빼곡하게 모인 시민들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힘찬 구호로 상징된다. 40년 전 분수대를 연단으로 민주화성회가 열렸던 그곳의 함성은 지금도 커다랗게 들려오고 있다. 그 소리들이, 같은 분수대와, 같은 시계탑이, 오늘 이곳을 오가는 시민들의 가슴을 두드린다.

도청 건물은 아시아문화전당 건립과 함께 일부 훼손됐지만 곧 복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도청과 이어진 옛 건물에는 건물 외벽에 ‘5·18최후 항쟁지! 옛 전남도청’이라고 쓰여진 문구와 길가의 ‘5·18 진상규명’이라고 쓴 설치글씨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40년 전의 역사를 큰 목소리로 증언하고 있다.

# 도청 옆 회의실과 상무관

도청이 옛 시민군 본부와 최후의 항쟁지라면 회의실과 앞 마당, 상무관은 ‘통곡과 애도의 울음’이 맺힌 곳이다.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에 희생된 시신들이 태극기에 덮인 채 혹은 미처 수습되지 않은 채 놓여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당시 희생자들의 유족은 이 장소를 쉽게 바라보지 못한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시신을 확인하며 다녔던 그 기억이 아직도 다리를 휘청이게 한다. 광장바닥에는 계엄군에 연행되는 학생들의 모습을 상징화한 보도블록이 슬픔을 담고 길게 늘어서 있다.

회의실 앞쪽에는 새로 만든 ‘5·18민중항쟁 알림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탑에는 시신을 앞에 둔 어머니와 또 다른 시민군 아들의 결의에 찬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광장을 지켜보고 있다.

# 금남로와 전일빌딩, 기록관

옛 전남도청에서 금남로로 이어지는 초입에 선 전일빌딩. 최근에 헬기 사격에 의한 총탄자국이 화제가 되면서 조명을 받았던 건물이다. 새 단장 중인 건물은 외벽의 총격 자국을 그대로 남겨 지나가는 이들에게 당시의 잔인했던 진압을 웅변하고 있다.

왕복 5차선의 금남로는 그다지 넓지 않은 대로지만, 광주에서는 대형 금융기관 등이 자리 잡은 도시 핵심 번화가이다. 지금은 과거의 함성을 간직한 채 평화롭고 화려한 건물들만 보이지만 6월항쟁과 촛불이 불타오르던 시기에는 ‘광주정신’들이 모이는 광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다.

금남로에는 옛 광주가톨릭센터로 쓰이던 건물이 이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바뀌어 서 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함께 기록관이 된 이 건물은 항쟁 당시 윤공희 대주교가 창문을 열고 폭력이 이뤄지는 장면을 내려다보며 기도했다는 ‘진실의 눈’이 설치돼 있다. 이 건물은 이후 민주화운동 시기 사제단 단식 장소 등으로 쓰이며 광주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 5·18 자유공원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등 연행자들에 대한 조사와 고문을 가했던 상무대 영창과 법정을 원형 복원한 곳이다. 1980년 8월에 지어진 법정은 당시 구속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비공개 약식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했던 악명 높은 장소다. 사형 5명 등 모두 421명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구속자들은 당시 입정과 출정 시 부당한 재판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애국가를 소리 높이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당시의 법정과 영창 상황 재현극 등이 펼쳐지는 등 방문객들의 체험 활동도 할 수 있다.

공원 한편에는 들불야학 7열사를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당시 야학을 통해 소외된 노동자와 함께 일하려 했던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윤상원 열사와 박관현 열사 등의 이름이 새겨졌다. 근로자 속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려 했던 대학생, 그들이 만난 5월과 항쟁, 그리고 희생. 당시 젊음이 향하는 행로와 그 역사적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보였다.

국립5·18민주묘지의 광주민중항쟁추모탑.
5·18민주묘지 조성 이전의 ‘망월동 묘역’ 전경.

# 국립5·18민주묘지와 구묘역

국립5·18민주묘지는 옛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던 희생자들을 이장해 1997년 조성한 곳이다.

40미터 높이의 주탑은 1980년 ‘광주정신’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안아 승화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추모탑이라 쓰여진 탑을 지나가면 넓게 펼쳐진 광장에 펼쳐진 광주영령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조성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묘비도 조금씩 세월의 풍상을 입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 너의 죽음이 조국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값진 것이었음을 우리 모두 기쁘게 생각한다’ ‘그때의 외침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심어 놓으시고 오늘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키워갈 때 그때의 외침은 참된 삶입니다’ ‘1980년 5월 20일. 피 흘려 쓰러져가는 동지들을 구하려 기독교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무자비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함.’

비명은 모두 피 토하는 외침으로, 살아있는 이들의 부끄럽지만 가열찬 다짐으로 각인된 듯하다.

이제 민주묘지로 이장이 이뤄졌지만 망월동 구묘역은 옛 아픔이 더욱 애절하게 남아있다. 자리를 그대로 남겨놓은 묘터가 대부분이지만 그 곁에는 80년대, 90년대 민주주의를 외치다 산화한 민주열사들이 그들의 넋을 위로해 준다. 최근에는 영화 ‘택시운전사’로 유명해진 당시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유품이 안장된 표지석도 들어서 있다.

구묘역의 햇살은 벌써 오월인 듯 오후의 한복판을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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