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나라사랑신문은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과, 6·25전쟁 70주년, 그리고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온라인신문 특별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라사랑신문과 국가보훈처 보훈교육연구원(원장 이찬수)이 공동 기획하는 이 특별 연재는 올해 하반기 시작될 우리 신문의 ‘오프라인신문 구독체제 개편 및 온라인신문 강화’에 따른 새로운 기획입니다.

오는 오늘(4월 14일) 첫 연재가 시작될 특별기획은 독립·호국·민주 각 보훈분야의 정책방향 제시와 보훈문화 발전을 위한 전문가 기고로 이뤄지며, 나라사랑 홈페이지(www.narasarang.kr)에 게재됩니다. 2주에 한 번씩 6개월간 계속될 이번 기획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다립니다.

우리나라 땅에서 바라본 DMZ의 모습. 가까워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다.

보훈을 다시 생각한다

‘보훈’이라는 언어는 익숙하지만, 그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가령 국어사전에서는 보훈을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에게 훈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일”로 규정한다. 이 때 ‘나라를 사랑한다(愛國)’는 것, ‘공을 세운다는 것’(有功)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지다 보면, 그 경계는 늘 모호하다.

참전 용사가 국가유공자일 수 있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희생적으로 노력하는 이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다. 나아가 양심적이고 선량한 삶도 넓은 의미에서 국가유공의 행위일 수 있다. 이들 없이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와 법률적 판단에 따라 유공자가 결정되곤 하지만, 설령 그런 법률적 판단 밖에 있다고 해서 유공자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우열을 매기기는 힘들다.

지구화 시대의 보훈

이 때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가령 어느 참전 용사의 애국 행위는 상대국 입장에서는 가해 행위였을 수 있다. 세계화 시대, 국가 간 교류가 빈번하고 왕래가 자유로워질수록 이런 불편한 진실은 반드시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지구화 시대 보훈의 성격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어느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가 다른 국가에 유익이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타자 포용적 보훈의 가능성이다. 국가를 위한 희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인류 사회를 만드는 일, 이른바 ‘선제적 보훈’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훈의 의미를 국경 중심의 근대 민족국가 범주를 넘어, 탈 경계적 세계시민사회에 어울리도록 재규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평화로서의 보훈

보훈은 사회적 공평이나 공정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사회적 공평과 공정을 실현하는 과정은 평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특정 국가가 평화를 자국 중심으로만 이루려다 보면, 그 평화의 실천이 타국에게는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말을 내세워 헌법을 개정하고 군대를 보유하려는 시도가 한국 및 주변국에 위협이 되는 경우가 그 사례이다. A국가가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B국가에 대한 적대적 행위가 된다면, B국가는 그에 도전하려 할 테고 A국가는 그 도전으로 다시 위협에 휘말리게 된다. A국가의 평화가 부메랑처럼 A국가에게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평화도 자기중심적으로만 이루려다 보면 평화라는 이름의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보훈은 국가의 유지와 사회적 공평의 기본이지만, 그 공평이 다른 국가에 대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보훈이 자국 안에서만 공정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아가 세계시민사회와 조화할수록 좋다는 뜻이다. 그런 보훈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가령 북한에 적대적이지 않은 남한의 보훈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평화의 관점에서 보훈을 다시 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단 평화란 무엇인지부터 정리하며 생각해보자.

평화는 감폭력이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한 사회가 공평하고 조화로울수록, 상처와 갈등이 적을수록 평화가 커진다고 보았다.

 

평화에 관한 아주 간결한 도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가 이제까지 이런 공평과 조화를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 사이 혹은 소규모 집단이 일시적으로 공평을 경험할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의 조화로운 타협이나 해결을 잠시 경험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공평하고 조화로웠던 적은 없다. 어디선가 공평을 이루려는 이유는 현실이 공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현실이 조화롭지 않다는 뜻이다. 어디선가 상처와 갈등이 있기에 공평과 조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상처와 갈등이 더 크다. 이것은 상처와 갈등을 줄이는 만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부정적 가치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긍정적 가치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평화는 상처와 갈등을 줄이는 과정이 된다. 불공평과 부조화, 한 마디로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 평화이다. ‘감폭력(減暴力)’의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보훈은 평화이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진 폭력에 맞서서 국가, 사회,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을 우리는 국가유공자로 규정하고 기꺼이 그에 보답하며 살고 있지 않던가. 각종 보답으로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공평과 통합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보훈 역시 상처와 갈등을 줄여 공평과 조화를 도모해가는 평화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물적 보답과 심신의 치유를 동반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복지의 사례이기도 하다. 보훈은 평화이자 동시에 복지인 것이다. 복지로서의 보훈,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이찬수(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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