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960년 4·19혁명과 함께 민주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운동과 3·8민주의거, 3·15의거가 각각 60주년을 맞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질주를 막아낸 힘은 피끓는 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대구와 대전, 마산을 돌아 서울로 올라선 학생들의 정권에 맞선 의로운 투쟁, 이 투쟁은 결국 4월혁명을 거쳐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민 주권의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다. 1960년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현장을 2회에 걸쳐 싣는다.

1960년 2월 28일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도청으로 향하고 있는 경북고 시위대의 모습.

2·28민주운동 - 최초의 시위, 4월혁명의 출발점

2·28민주운동일인 1960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는 날이다.

이날의 의미는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 맞선 고교생들의 시위’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정치권력에 저항해 벌인 최초의 민주시위였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운동사에 첫 획을 그은 날이 된다. 이 운동은 이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를 일으켰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이 운동의 주체들은, 일각에서 2·28민주운동이 ‘4·19혁명의 도화선’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고 얘기한다. 2·28민주운동는 ‘4·19혁명의 한 부분’이며, 1960년 봄 민주운동의 분명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야당 민주당의 유세일. 당시 이승만 정권과 학교는 전날의 자유당 집회에는 적극 동원을, 이날 민주당의 집회에는 참가 원천 봉쇄를 추진했다. 일요일인 이날 대구 시내 학교들은 모두 학기말 시험, 식목행사 등을 이유로 학생들을 강제 등교키로 했으나 학생들은 2~3일 전부터 학생조직인 ‘학생위원회’ 등을 열어 시위를 기획하고, 학교 간의 의견을 모아나갔다.

경북고 학생들은 자체 의견을 모은데 이어 시위에 사용할 결의문 작성을 준비하는 한편, 타학교와의 연대에 적극 나섰다. 전날 9시경 모인 학교 대표들은 시위 집결장소를 반월당으로 정했다.

마침내 2·28 당일. 경북고에서는 12시 50분경 등교를 마치고 800여 명의 전교생들이 조회단 앞으로 모여들었다. 인근 대구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즉각 학생부위원장이 조회대에 뛰어올라 결의문을 읽어내려 갔고 이어 1시 5분경 교직원들의 저지를 뚫고 반월당을 향한 시위대가 교문을 넘어 시내로 출발했다. 경북도청까지 진입한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와 무자비한 곤봉세례로 시내 곳곳으로 흩어져 산발적 시위를 이어갔다.

대구고는 학교에서 토끼사냥(겨울철 지방에서 흔하게 했던 사냥)을 하겠다며 하루 전에 전교생의 등교를 통보했다.

시위 당일 경북고 시위 소식을 전달받은 학생들은 교직원들의 제지에도 100여 명이 우선 교문 밖 진출에 성공했고 이들은 경북여고 등을 거쳐 반월당을 지나 중앙파출소로 향했다. 남은 학생들은 1차 선발대가 다시 교내에 들어선 것을 계기로 많은 학생들이 합류해 새로운 시위대를 형성하고 시내로 행진했다.

경북대 사대부고 학생들은 청소와 게임을 이유로 등교를 강요받았다. 교사들은 정문을 걸어 잠그고 학부모를 동원해 학생조직을 와해하려 했으나 강당에서 연좌시위에 들어간 학생들은 농성 4시간만인 저녁 7시에 담장을 넘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학생들은 개별로 정문을 나선 다음 2개 학교가 합세해 700여 명의 시위대를 만들어 수성교로 행진을 이어갔다.

대구공고는 학생위원장이 운영위원회를 연 후 학생자율의 훼손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낸 후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으며 시내 진출 도중 경찰의 저지를 받다 뿔뿔이 흩어져 시위에 돌입했다.

대구상고는 학교의 저지에 개별 시위를 끝내고 이튿날 오전 9시 시위에 합의한 후 1교시가 끝난 후 모두 운동장으로 집결해 시위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효시로 꼽히는 2·28민주운동은 이후 4·19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불길을 이어가면서 대학생, 교사, 시민들과 함께 혁명의 완성을 향해 여러 활동으로 이어졌다.

2·28은 4·19혁명의 대장정을 시작한 출발점이었으며, 4월혁명으로 계승됐다. 이렇게 시작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은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3·8, 3·15, 그리고 4·19로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뤄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대구지역의 한 신문은 “2·28정신은 대구 경북의 시민정신으로 발전돼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물론 이를 위해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진취성과 과단성 등은 앞으로 전개될 지방시대를 위한 시민정신으로 갖춰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면서 2·28이 대구 경북의 시민정신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0년 3월 8일 경찰에 의해 집단연행되면서도 ‘학생 언론 탄압 반대’ 구호를 외치는 대전고 학생들.

3·8민주의거 - 충청권 최초 민주화 운동, 4월혁명의 도화선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자유당 독재정권과 인권유린에 대항해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민주화 운동이다. 3·8민주의거는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역사적 교훈과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3월 대전지역에도 대구에서 일어난 2·28민주운동 소식이 전해왔다. 특히 이 일을 계기로 서울로 시위 사태가 이어지면서 대전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국과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전고 학도호국단장은 3월초 보문고에 재학중이던 친구의 방을 빌려 간부들과 함께 이승만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전지역 연합학생시위를 기획하게 된다. 날짜는 3월 8일. 장면 박사의 대전공설운동장 유세일을 시위일로 잡고 대전여고, 대전공고, 대전상고, 보문고, 대전사범학교 등 5개교에 중학교 동창들을 통해 연락을 했다. 하지만 타교와의 연락 과정에서 정보가 새나가고 말았다.

3월 7일. 수업도중의 학생간부들이 교장의 관사로 불려갔다. 다음날 대전으로 예정돼 있던 민주당의 정견발표회에 학생들이 한사람도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충남도의 지시사항이 전달됐다. 학교로 돌아온 간부들은 이 조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한편, 수업이 끝난 후 간부들 모임을 통해 8일 전교생이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5교시가 끝나고 오후 3시경 시위를 시작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다음날 다시 간부들에 대한 교장의 회유가 있었으나 일부 간부학생들이 먼저 빠져나가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불을 붙였다. 학교로 되돌아온 이들은 결의문을 낭독했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불미스런 도와 학교 당국의 처사에 대하여 이의 조속한 시정을 촉구하는 바이며, 이로써 대고의 명예와 우리의 앞날을 더럽히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하나, 외부세력의 침투방지. 둘, 교내의 선거운동 중지. 셋, 서울신문 강제 구독 사절. 넷, 학생 언론 탄압 반대.”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벽을 넘거나 교문을 밀고 나가 교장관사에 가서 사실상 감금상태를 해제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유세장으로 밀고 들어가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의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앙시장 대전역 등지로 흩어진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면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지지하고, 경찰의 저지를 받으면 흩어지는 상황이 늦게까지 계속됐다.

3·8민주의거의 시작이 대전고 1개교가 집단으로 참여하고 타 학교들이 개별 참여했다면 이어진 시위는 대전상고의 차례였다. 3·8 이틀 후인 3월 10일 대전상고 학생 600여명은 오전 9시 30분경 조회를 마치자 바로 대열을 지어 교문을 나서 ‘학원의 자유를 달라’ ‘친구를 빨리 내놓아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0여 분 간의 기습 시내 시위를 벌인 학생들은 강제 해산을 당해 뿔뿔이 흩어진 채로 학교로 돌아왔다.

시위 관련한 후유증도 깊었다. 대전고의 경우 공무원 자녀가 많다는 등의 사유를 근거로 사찰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나, 대전공고와 대전상고에는 시위 이후 상당 기간까지 사찰이 진행됐고, 대전공고와 보문고의 시위는 끝내 사찰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불발로 끝났다.

3·8의 열기는 이어져 4·19가 알려진 4월20일에는 특정한 주도세력이 없이 각급 학교에서 뛰쳐나온 시위가 이어졌다.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있은 후에는 충남대, 대전대(현 한남대) 학생들과 시민까지 합세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하게 된다.

3·8민주의거는 이렇게 이틀간 벌어진 대전 시내 고교생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규정하는 뜨거운 단어가 된다.

1960년 4월 11일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내 중심가로 모인 시민들이 자유당 독재정부 타도를 외치고 있다.

3·15의거 - 유혈투쟁, 김주열, 그리고 4월혁명

2·28민주운동이 불씨가 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항의시위는 3·8대전 등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 직후 일부 학생들이 공명선거추진전국학생투쟁회 이름으로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살포한데 이어 선거운동이 펼쳐지는 전국 곳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유인물이 뿌려지거나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선거 전날인 14일에는 저녁 8시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고교생 1,000여 명이 산발적으로 유인물 살포와 함께 공명선거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3월 6일 계획했던 마산고 시위가 무산된 상황에서 13일 소규모 유인물 살포, 14일 오후 6시 소규모의 학생시위가 예열하듯 일어났다. 선거일인 3월 15일. 전날까지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마산의 학생들이 나섰다.

15일 투표 현장은 부정선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사전 투표가 적발된데 이어, 당일 야당 참관인을 투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부정선거를 적발한 참관인에 대한 협박과 연행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투표장을 찾은 시민들이 사전선거로 정작 본인이 선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무더기로 벌어지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 경 선거보이코트를 선언했다.

오후 2시 자유당 마산시당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순식간에 불어난 시민과 학생들은 1,500여명에 달했다. 해산을 요청하는 경찰장과의 몸싸움, 그리고 군중들의 항의는 시위대에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오후 2시 30분 경 오전에 연행됐다 풀려난 민주당원 100여 명이 가두시위의 불가피성을 역설했고, 시내 일원의 시위는 계속됐다. 한 시간 여 후에는 경찰의 무자비한 곤봉 진압이 시작됐고 이에 자극받은 시위대는 순식간에 5,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놀란 경찰은 모두 현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물대포 저지와 시위대의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장경찰이 투입됐고, 일부에서는 반공청년단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오후 5시경 시위는 일단 정리되는 모습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거리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다시 부정선거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7시가 넘어서면서 1,0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출소를 향했고 시위대의 함성은 노도와 같이 이어졌다. 순간 총소리와 함께 시위대 앞의 학생이 쓰러졌다. 8시 10분경의 이 사격은 공포탄이 아닌 실탄 사격이었다. 여기서 1명의 사망자와 2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시민들은 격앙됐고 파출소를 장악했던 이들은 시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숫자는 1만 여명에 달했다.

시청앞에서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우리의 주권을 다시 찾자” 등의 구호가 우렁차게 지축을 뒤흔들었다. 1만여 명의 시위대와 투석전 등이 벌어지던 중 경찰은 갑자기 실탄 사격을 시작했고 시위대가 쓰러져 갔다. 밤하늘의 조명탄 아래 시민을 상대로 한 실탄 사격, 공포를 느껴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한 추적 사격이 집요하게 계속됐다

시위대 중심부를 향한 최루탄 사격 과정에서 4월혁명을 촉발케 한 불사조 김주열 군이 최루탄에 얼굴을 맞고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곳에서도 4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어 도심의 유혈전은 계속됐고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는 등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흘렀다. 마지막 남은 200여 명의 시위대가 최후까지 버티다 체포된 시각은 새벽 2시 30분이었다.

다음날 경찰은 시위의 배후에 ‘공산당 개입 여부를 수사 중’이라며 시민들의 항의를 폄훼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진상조사 명분으로 고문이 이어지고, 시민들은 무자비한 폭행에 노출됐다.

그러던 중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 바다 수면 위로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이었다. 시민들이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으로 모여들었고 2차 의거가 시작됐다.

저녁 6시경 300여 명의 중고생들이 “협잡선거 다시하자” “살인선거 다시 하자” 플래카드를 들고 시작한 시위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자정까지 계속된 시위는 시내 곳곳을 다니며 부정선거의 원천무효와 선거 재실시, 정권 퇴진 등을 외치며 마산 3·15의거의 정점을 찍게 된다.

3·15의거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 민권투쟁의 역사적 좌표가 된다. 그리고 민족이 문화적 생활공동체임을 다시 확인해주었으며, 현대적 의미에서 한국민족이 안고 있는 제반 모순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해소하는 생명력을 발휘했던 것이다.(3·15의거사)

이제 마산의 두 차례 의거를 거친 민주의거는 4·19혁명으로 향한다. 마지막 민주주의 승리를 향한 전 국민의 의거와 투쟁이 화산처럼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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