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에서 한국광복군으로 1938년 김원봉에 의해 창설된 조선의용대(1938년 10월 10일 성립 기념 촬영)는 한국광복군의 전신에 해당한다. 초창기 병력 200여 명에서 출발했으며 항일운동사에 많은 공을 쌓았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군(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하면서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18일자로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이후 광복군은 3지대로 재편되면서 조직과 전투력이 급격하게 증대됐다.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됐다. 그 해 9월에는 노령, 한성의 임시정부를 합쳐 새로운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국 및 연통제가 일제에 의해 와해되면서 임시정부는 긴 침체 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통해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았지만 오랜 근거지였던 상해를 떠나야 했다. 그 후 중국 대륙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1940년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중경에 도착했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정비하고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는 정부(정)·한국독립당(당)·한국광복군(군)의 삼위일체 체제를 확립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됐다. 1919년 임시정부는 수립 당초부터 일본에 대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했다.

다만 이러한 목표의 실천은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토대의 결여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봉길 의거 이후 피난 중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창설을 준비하고 추진했는데, 1940년 중경에 안착한 다음에 비로소 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었다.

대원을 모으고 훈련시키다

한국광복군의 사격훈련 모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선전성명서.

총사령부를 먼저 창설한 광복군의 최대 급선무는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창설을 준비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해 화북일대에 이주해 온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 및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주된 지역은 산서성의 임분(臨汾) 등지였다.

이와 동시에 모병활동을 추진하기 위한 별도의 기구로 징모분처가 수원성 포두, 강서성 상요(上饒), 안휘성 부양(阜陽)에 각각 설치됐다. 또한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후 호북성 노하구(老河口)와 절강성 금화(金華)에 각각 구대를 설치, 대원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경에는 총사령부와 3개 지대가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광복군의 활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와 적후방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모집공작,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적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활동 등이었다. 특히 중국 내 한인청년들에 대한 모집활동은 성과가 매우 컸다. 1944년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온 한인청년 수십 명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했고 1945년에는 수백 명의 한인청년이 광복군 대열에 합류했다.

1945년 3월 514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그해 8월 전후 약 1,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의 훈련을 위해 서안에서는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을, 안휘성 임천에서는 한국광복훈련반(한광반)을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했다.

 

인도·버마에서 싸우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광복군은 인도·버마 전선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광복군은 1943년에 들어서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군과 협동해 항일전을 수행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에서는 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인원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총서기인 김원봉은 최성오, 주세민 등 2명을 인도에 파견했다. 영국군은 일본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을 필요로 했고, 그 인원을 민족혁명당 측에 요구해 왔다.

그리하여 1943년 5월에는 민족혁명당이 버마전구 영국군 총지휘부와 협정을 체결했다. 그 후 한영 합작은 다시 광복군총사령부로 이관해 추진됐다. 1943년 9월에는 인도 주둔 영국군의 대일전을 지원하기 위해 대장 한지성 등 9명의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인도에 파견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광복’ 잡지.

이들은 8월초부터 중국군사위원회에서 3주간에 걸쳐 현지에 대한 예비지식을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현지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군 포로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 수행을 돕는 임무를 띠고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됐고, 주로 일본군을 향한 대적방송, 적 문서 번역, 전단 제작, 포로 심문 등을 담당했다.

공작대는 실전에도 참여했다.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Imphal) 전투와 1945년에 전개된 버마 총반격전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한반도 진입작전을 전개하다

한국광복군 OSS훈련반

광복군의 지상목표는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야 그것을 전망할 수 있게 됐다. 미일전쟁의 발발로 광복군의 대일전 참여가 가시화되면서 임시정부는 미국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부에 대해 한인의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필리핀 점령, 특히 6월 말 오키나와 점령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게 됐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태평양지역에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에 파견해 한반도 상륙작전이 전개될 경우 이에 협력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김구 주석은 미국정부에 대해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하면 그곳에서 모든 한인들을 지도해 대일전에 협조할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 들어 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그것은 광복군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전개한다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으로 구체화됐다.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 대원 가운데 50명이 선발돼 제1기생으로 5월 중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8월 4일 수료했다.

8월 7일 김구와 OSS의 총책임자 도노반 장군에 의해 특수훈련 수료생들을 중심으로 국내진입작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지면서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는 김구의 탄식처럼 광복군은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작해 한국 내 공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앞서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의 활동범위와 합작대상국을 확대시키고 질적으로 심화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광복의 꿈을 위해 분투하다

광복군은 대한제국의 국군과 만주의 독립군을 계승하고, 30여 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기반으로 창설되었던 자주독립군이었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래 열악한 물적·인적 기반과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제약 하에서도 광복 전후 약 1,000명이라는 인원을 확보한 무장세력으로 발전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국제적으로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광복군이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을 수행한 것이나, 미국의 OSS와 합작하여 공동작전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시도였다.

이와 같이 광복군은 열강이 임시정부를 외면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려고 노력했다. 나아가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그것의 규모나 실현 여부를 떠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움직임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광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