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독립군부대 모습. 
1922년 대한통의부 의용군 훈련 광경. 
최근 뮤지컬로 제작돼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공연 중 한 장면.

무력투쟁과 전쟁을 준비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서간도에서 존속하면서 3,500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해낸 한국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2015년에 개봉되어 1,270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영화 ‘암살’에서 감초역할을 맡은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열연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들을 만주에서 선발하여 국내로 침투시킨 김원봉이야말로 실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함으로써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와 함께 작전을 지휘하는 것으로 나오는 김구 역시 실제로 해외 무관학교의 설립구상 단계부터 참여했던 신민회 회원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신민회는 1907년 국내에서 조직된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였다. 1910년 봄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설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독립전쟁전략의 골자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일대에 독립기지를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 진입이 가장 편리한 지대를 선정한다, 여기에 신한민촌을 건설한 후 민단을 조직하고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을 양성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하고 일제의 야욕으로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이 일어나는 때를 기다려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이었다.

1910년 8월 하순,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이회영·이동녕·장유순 등이 종이장사로 가장해 남만주 일대를 시찰하고 후보지를 선정했다. 귀국 후 이회영 6형제는 모임을 갖고, 모든 가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정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삼한갑족의 칭호를 받던 이들 형제의 서간도 이주가 국내외 동포들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일행이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했다. 안동 유림세력인 이상룡·김대락 등도 뒤를 따랐다.

신흥무관학교, 독립전쟁의 중심으로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의 대고산 자락 밑으로 모여든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1911년 4월 민단 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그리고 6월에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신흥’이라는 명칭은 신민회의 ‘신’자와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뜻의 ‘흥’자를 합한 것이다. 애초에 신흥강습소는 민단조직인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두 조직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간도 일대를 통할하는 민단 겸 무관학교로 기능했다. 경학사가 공리회-부민단-한족회로 발전해 갔던 것에 발맞춰, 신흥강습소도 신흥중학에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러나 신흥강습소 시절부터 당시의 독립운동자나 학생들, 주민들은 이곳이 무관학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신흥무관학교라고 불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제도는 3년간 중등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하는 본과와 1년 단기속성의 군사과로 구분했는데, 본과에서도 군사훈련에 비중을 두었다. 여기에 속성과를 두어 장교반 6개월,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 1개월 과정도 운영했다.

체제를 갖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전쟁을 대비한 다수의 군관 양성을 위해서 학교의 기능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1912년에 통화현 합니하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했고, 3·1운동 이후 독립을 열망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자 본교를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고, 통화현 7도구 쾌대모자에도 분교를 설치했다. 현역 일본군 장교인 이청천·김경천이 최신 병서와 군용지도 등을 갖고 신흥무관학교로 망명하고, 신팔균·오광선이 교관으로 합류하면서 무관학교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에 보도된 참의부 대원 사진과 기사(1937.7.31).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학생들이 펴낸 ‘신흥교우보’ 제2호.

1913년에는 졸업생과 재학생을 망라한 신흥학우단이 조직됐다. 신흥학우단은 유사시 무장병력이자 신흥무관학교를 일제의 밀정들로부터 지켜내는 호위부대로, 그리고 독립정신 고취의 주된 매체가 된 ‘신흥학우보’를 발행하는 언론기관으로 활약했다.

1915년에는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의 이목을 고려해 농장이라고 명명한 제2군영인 백서농장을 통화현 쏘배차에 건설했는데, 거의 4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이 병영체제 하에서 숙영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과 러시아와의 군사동맹관계가 형성되자, 일찍부터 국외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던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그 여파로 서간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가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동안 연해주를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상설과 이범윤 등도 합류해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연결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이범윤은 서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뿐 아니라, 하얼빈·상하이·베이징 방면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락체계를 관리했다.

이들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신흥무관학교와 매월 수차례 서신을 왕복하고, 1개월에 2,3회 밀사를 파견해 연락을 유지했다. 그 중심에서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는 물론 국내 각지에 특무요원을 파견해 청년모집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했다.

1919년 5월 부민단은 한족회 및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동년 11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만주에 존재하는 직할 군정부인 서로군정서로 재편됐다.

서로군정서의 부대로는 의용대와 교성대가 있었다. 의용대는 군대였고, 교성대는 생도들이 주된 병력이었다. 이와 같이 3·1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가 크게 성장하자, 일제는 중국 당국과 함께 한족회원들을 체포해 학살하는 등 압박을 가해왔다.

1920년 5월 ‘중·일 합동수색대’가 편성되어 한족회 탄압에 들어가자, 서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8월 피난을 결정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성대를 편성해서 안도현 삼림으로 이동했다.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교성대는 홍범도 부대와 합류해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이들은 북간도지역 독립군부대들과 연합작전을 전개해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초대 경학사 사장 이상룡 선생.
대한독립군 총사령 홍범도 장군.

 

 

 

 

 

 

 

임정 군사담당자, 의열단 중심 역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서로군정서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는 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북로군정서가 결성될 때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이장녕·이범석을 비롯해 졸업생 김훈·오상세·박영희·백종열·강화린·최해·이운강 등이 교관으로 초빙돼 북로군정서의 주요 간부를 맡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그밖에도 만주지역에서 대한통의부를 비롯해 만주지역의 3부로 유명했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에서 활동했다. 3부 통합이 결렬된 후에는 한국독립군, 조선혁명군 등으로 활약하면서 대전자령전투, 영릉가전투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관내로 들어가 한국광복군의 주역이 됐고, 일부는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신흥무관학교 측 인사들은 독립군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9년 공포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주요 발표자로 참여하거나, 아나키즘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됐다. 또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책임지는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일부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괴롭혔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지휘했으며, 한국광복군의 주요 간부들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선구가 된 ‘대한독립선언서’는 외교독립론이 아닌 전쟁을 통한 독립의 쟁취를 주장한 것으로, 독립군의 독립전쟁전략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독립군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주로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들의 총칭이다. 독립전쟁전략은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위한 확실하고 바른 길은 한민족이 그들과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그 결과로써만 가능하다는 독립운동의 이론체계였다. 이에 비추어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추진하기 위한 요람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오늘 우리 국군의 뿌리를 대한제국 군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둔다면, 독립군은 그 둘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박성순 / 단국대 교수

공동기획 : 국가보훈처 나라사랑·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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