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유지해오는 동안 많은 나라를 세웠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등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다. 나라가 망하면 다시 나라를 세우면서 반만년의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고, 현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세워졌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운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접적인 계기는 3·1독립선언이었다. 1919년 3월 1일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고 하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1919년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는 독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3·1독립선언서의 핵심이다.

 

독립국 선언- 독립국 ‘대한민국’ 세우다

 

▲ 1920년 1월 1일 3·1운동의 뜨거운 열기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신년축하회로 함께 모였다.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니, 독립국을 세워야 했다. 만일 독립국을 선언하고서도 독립국을 세우지 않았다면, 3·1독립선언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3월 1일을 ‘3·1절’이란 국경일로 제정하고, 이를 기념하고 있다.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실제로 독립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었고,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유지 운영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많은 인사들이 중국 상해로 모여들었다.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이들 중 29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먼저 현재의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을 설립하였다.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의 사회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됐다.

여기서 처음 결정한 것은 국호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회의는 밤을 새워가며 계속됐다. 이어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한 정부의 관제를 결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등을 선출함으로써 정부를 구성했다. 이로써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 1919년 4월 11일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최재형 이동휘 문창모 등 요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다른 지역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각각의 지역적·인적 기반을 배경으로 독립국을 세우고자 했고, 모두 8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실제적인 인적 기반과 조직을 갖춰 수립된 것은 3곳이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에서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국민의회, 국내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한 한성정부였다.

상해·연해주·국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는 지역적 기반도 달랐고, 인적 기반도 같지 않았다. 세 임시정부가 모두 민족의 대표기구로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세 임시정부는 통합을 추진했다. 통합문제는 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둘 것,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할 것, 상해와 연해주의 각원은 모두 사퇴하고 한성정부에서 선출한 각원으로 하여금 정부의 각원을 맡도록 한다는 것으로 합의를 이뤘다. 국내에서 국민적 기반에 의해 수립된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세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하고, 새롭게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 의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였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휘를 국무총리, 그리고 한성정부의 각원들을 각 행정부서의 총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세 곳의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일을 이뤘다. 통합정부는 1919년 9월 11일 공식적으로 선포됐다.

 

임정에서 비롯된 국민주권·민주공화제

 

▲ 1948년 8월15일 해방의 기쁨을 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의미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둘째는 민주공화제와 국민주권의 역사를 열었다는 점이다. 고조선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는 군주가 주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1919년 9월 11일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법에 국가구성의 3요소를 밝혀 놓았다는 점이다. 제1조에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 제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음”, 제3조에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로 정함”이라고 해 놓았다. 국가구성의 3요소는 국민·주권· 영토를 말한다. 대한민국이 국가로서의 구성요소를 갖추었음을 헌법에 분명하게 밝혀 놓은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수립돼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한 때도 있었고, 활동이 부진하던 때도 있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국민적 기반 없이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부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 즉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문이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지만, 곧바로 독립된 국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은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했고, 전쟁에 이기기 위해 수십만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희생시켰다. 그 대가이자 전리품으로 한반도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영원히 차지하거나 오랫동안 통치하지 못했다. 3년 만에 한국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43년 카이로회의에서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시킨다’는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속이 있었기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영원히 차지할 수 없었고, 우리는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정, 장개석에 ‘한국 독립’ 관철 요청

 

▲ 카이로회담 당시 연합국 수뇌

(좌로부터 장개석 루스벨트 처칠)들의 모습.

잘 알려져 있듯이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의 자유 독립’이 들어가 있다. 카이로선언은 미·영·중 3국의 수뇌들이 카이로에서 회의를 갖고, 여기서 합의한 것을 발표한 것이다. 회의에서 중국의 장개석이 루스벨트에게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했고, 루스벨트가 동의하했다. 그러나 영국은 ‘한국의 자유 독립’이란 내용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수정하자고 했고, 이를 받아줄 수 없다면 한국에 대한 것은 아예 빼버리자고 했다. 영국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조건부로 합의를 이뤘다.

그런데 이 ‘한국의 자유 독립’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거둔 성과였다. 장개석이 루스벨트와 회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43년 7월 26일 김구·조소앙·김규식·이청천·김원봉이 장개석을 찾아갔다. 이들은 장개석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관철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어렵지만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개석은 약속을 지켰고, 카이로회의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한국의 자유 독립’은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 얻어낸 성과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로선언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국회에서 수립했지만, 이는 대한민국을 새로 세운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하는 방법으로, 즉 그대로 이은 것이다. 우리는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받은 것,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유지하며 살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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