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대원 일계급 특진을 이뤄낸 진동리 전투 참가 부대원들 모습.

대한민국 해병대의 신화는 낙동강 전선의 진동리 전투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한국 해병대는 진주를 점령한 후 마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진동리 일대에서 격전을 통해 저지했다.

그 전공으로 국방부는 부대장 김성은 중령을 포함해 전 부대원을 일계급 특진시켰다. 6·25전쟁 발발 이후부터 진동리 전투까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망라해 전군에서 부대장을 포함해 전 부대가 일계급 특진한 사례는 단 세 번 뿐이었다.

1950년 7월 초순 6사단 7연대가 충청북도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격파해 크게 승리함으로써 연대장 임부택 중령을 비롯해 전 연대가 최초로 일계급 특진을 한 것이 최초. 그리고 이어 7월 중순 육군본부 직할 17연대가 경상북도 상주의 화령장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연대에게 섬멸적 타격을 주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두 번째로 연대장 김희준 중령을 비롯해 연대원 전원이 일계급 특진을 했다.

세 번째의 일계급 특진 영광은 한국 해병대가 차지했다. 해병대의 일계급 특진 역사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국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서 또 다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계급 특진을 하게 됐다. 그런데 통영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부대장이 최근 일계급 특진한 김성은 대령이었다. 따라서 부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병들만 일계급 특진을 하게 됐다. 당시 해병대사령관이 대령이었기 때문에 예하부대 지휘관이 1개월도 안된 사이에 계속 진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령관도 아직 못단 장군 계급장을 예하 지휘관이 먼저 달 수는 없었다.

 

워커 장군도 놀란 기동 작전

진동리는 마산 동쪽에 위치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진해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진동(鎭東)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진동리는 진주에서 마산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될 길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에서 마산을 거쳐 북한군의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이곳까지 진출해 있던 북한군 6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진동리를 확보해야 했다. 반면 그곳을 방어하고 있던 한국 해병대는 북한군 6사단의 진격을 막아내야 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한쪽은 막아야 했고, 한쪽은 그곳을 뚫고 지나가야 될 상황이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한국 해병대와 북한군 6사단이었다. 불꽃 튀는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혈투였다. 북한군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끈질기게 공격했다. 한국 해병대도 그런 북한군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악착같이 싸웠다. 중국 팔로군 출신의 방호산(方虎山)이 지휘하는 북한군 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도 최정예사단이었다. 6·25전쟁 초기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서울점령에도 기여했던 북한군 6사단은 한강을 건너 수원과 오산으로 진출한 후 천안에서 충청도로 빠져나와 전라도를 거쳐 하동과 진주를 점령하고, 부산 점령을 위해 마산 동쪽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런 북한군 6사단의 우회기동에 가장 놀란 사람은 국군과 유엔군을 총지휘하고 있던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었다.

워커 미8군사령관은 북한군 6사단의 부산 진출을 막기 위해 미 25사단과 미 해병대 그리고 한국 해병대를 그곳으로 투입했다. 그때 김성은 중령이 지휘한 한국 해병대가 진동리에서 북한군 6사단의 전진을 막으며 그곳을 지켜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찌는 더위 속에서 먼지도 톡톡히 한몫했다. 비 한 방울 없이 바짝 타버린 대지에 차들이 달리면 먼지가 자욱하게 쌓였다. 그때마다 목이 탔다. 물이 부족했던 해병들은 죽은 시체의 수통을 뒤져 물을 마셔야 했다. 피난 떠난 텅 빈 집들의 판자담은 물론이고 지붕과 대문 등에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더운 날씨 탓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담장위의 호박잎들도 찌들은 채 축 쳐져 있었다. 황량 그 자체였다. 밤에는 더욱 고역이었다. 모기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군복을 뚫고 피를 빨아대는 모기떼들은 북한군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다.

한국 해병대는 그런 열악한 전장 환경 속에서 싸웠다. 그리고 틈만 보이면 극성스러운 모기떼처럼 달려드는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저지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동리를 지켜냈다. 그런 해병대의 피나는 전투에서의 승리에 이승만 대통령도 가만있지 않았다. 김성은 부대장을 포함한 전 부대원들에게 일계급 특진을 지시했다. 이로써 한국 해병대는 1950년 8월 5일부로 전사자 포함 전 대원들이 일계급 특진을 했다.

해병대의 일계급 특진은 그곳에서 나와 있던 전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소장이 국방부에 상신해서 이뤄졌다. 그런 점에서 한국 해병대의 진동리 전투의 승리는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는 6·25전쟁을 통해 한국 해병대의 신화를 낳게 한 원동력이 됐다. 이후 진동리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한국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을 통해 ‘귀신 잡는 해병’으로 명성을 날렸고, 도솔산 전투를 통해 ‘무적해병’의 신화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 해병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미국 해병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그 시작은 진동리 전투였다. 그런 해병대에게 무한한 찬사와 존경을 보낸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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