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오후 어두컴컴한 방안에 검은 머리카락이라곤 한 올도 찾아볼 수없는 백발의 어머니가 앉아계셨다.

“나는 미망인이다.” “팔자 사나운 나는 남의 경사스러운 결혼식에는 평생을 가지 않았다.” “경사스러운 날 팔자 사나운 내가 무슨 축하를 할 수 있겠는가.”

내 가슴 속 어디쯤에 무언가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고, 김분남 어머니의 슬픈 시간들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2015년 1월 밤새 내린 눈으로 도로도 길도 모두 꽁꽁 얼었던 날, 어머니는 기침감기로 인해 병원을 가시던 중 낙상으로 오른쪽 팔목이 부러져 수술을 하셨다. 어머니는 당신 마음 같지 않던 주변의 환경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힘든 생활을 해야만 하셨다.

미망인 연금을 받으시던 날도 깁스를 한 어머니의 불편한 모습을 악용한 누군가에 의해 150만 원을 고스란히 소매치기 당하시고, 막막한 환경을 탓할 힘조차 없는 서러움에 몸져누워 계셨던 그 시절. 나는 그때 어머니를 처음 뵙게 됐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 없으셨던 어머니도 어색하셨겠지만, 나 역시 갓 시작된 짧은 방문으로 서로 서먹했었다. 나는 어머니의 동선부터 파악했다. 집에서 한참이나 먼 우체국까지 연금을 받으러 다니신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아무도 어머니께 편한 길을 알려드리지 않았다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보훈청에 어머니를 모시고 연금통장을 가까운 은행으로 바꿔 온 그 날, 까막눈에 귀가 어두워 밖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이제는 너무 든든하다고, 당신의 뒤에도 다 늙은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 가져주는 친정 같은 보훈청이 있음을 고마워 하셨다. “나는 이제 아무 걱정이 없다”며 미소 지으시는 어머니 모습에 어떤 체증 같은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소소한 공과금과 우편물, 편지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 드릴 때마다 경청하시는 어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행복해 하셨다.

전쟁은 끝났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평생을 기다림 속에서 이제는 팔순이 훨씬 넘어버린 나이로 어머니는 그렇게 나름의 세상을 살아가신다. 어머니의 세상은 참 따뜻하다. 어려웠던 그 세월 속에서 당신만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상처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아셨을까.

병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 친척들, 부모 없는 아이들, 독거노인들, 아파트 청소하는 할머니…. 어머니의 도깨비 방망이가 뚝딱뚝딱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부터 목욕비, 당신 치료비까지 소외되고 고통 받는 그들을 위해 아낌없이 쓰신다.

변변한 냄비조차 없고 몸에 밴 절약으로 싱크대, 화장실 플라스틱 통에 항상 가득 받아져있는 물을 보며 언제쯤 수도꼭지를 틀고 설거지를 하실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머니 항상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씀, “영감 목숨 값으로 내가 살아간다.” 남편 없는 칠십 평생, 어둡게 닫혀있던 세상과의 소통을 아낌없는 베풂과 관심, 사랑으로 할아버지 목숨 값은 그렇게 쓰였다. 항상 밝은 미소로 그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뚜벅뚜벅 잘 걸어오신 어머니, 그 앞에서 더욱 작아지는 내 모습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어머니는 편찮으시다. 굴곡진 세월을 살아온 대가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어머님이 힘든 몸을 이끌고 그렇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다.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까지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박명렬, 울산보훈지청 보훈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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