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해병대 용사들이 적의 저항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하는 모습. 

한국 해병대는 6·25전쟁을 통해 ‘귀신잡는 해병’과 ‘무적해병’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국방부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륙작전에 필요한 해병대를 창설했다. 그때가 1949년 4월 15일이다. 창설이후 해병대는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진해에서 대대규모로 창설된 해병대는 그해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해 공비토벌에 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그때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1,166명이었다.

전쟁 발발 후 해병대는 전북 이리로 출동하여 이곳으로 진출하던 북한군을 맞아 선전했고, 이후 지연전을 펼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는 미 해병대와 함께 경남의 진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부산을 노리고 통영에 진출한 북한군을 기습상륙작전으로 격멸했다. 한국 해병대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미국의 여자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히긴스(Maguerite Higgins)는 ‘귀신잡는 해병’으로 보도했다.

이로부터 10개월 후 한국 해병대는 미국 해병대도 포기한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끔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받았고, 이때부터 해병대는 ‘무적해병’으로 거듭나게 됐다.

 

점령임무, 한국 해병대로 교체

도솔산 전투는 원래 미 해병대가 맡았던 전투였다. 도솔산은 강원 양구의 중동부전선에 위치한 1148고지로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곳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도솔산 점령임무가 갑작스럽게 한국 해병대로 바뀌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미 해병대가 도저히 이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며 발을 뺐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가 도솔산 전투를 포기한 이유는 도솔산이 워낙 험준할 뿐만 아니라 그곳을 방어하던 북한군이 좁고 가파른 암석지대에 지뢰를 묻고 수류탄과 중화기를 배치해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으로 요새화함으로써 이를 공략해야했던 미 해병대는 처음부터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 해병대가 그런 인명손실을 내고도 도솔산 전투를 도저히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도솔산 점령임무는 미 해병대에서 한국 해병대로 바뀌었다.

그런데 미 해병대가 어떤 부대인가? 미 해병대는 태평양전쟁시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치며 그들을 전율케 했던 부대가 아닌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그런 미 해병대를 믿고, 펜타곤(미 국방부와 합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미 해병대는 맥아더의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세계의 전략가들을 놀라게 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6개월 전만 해도 장진호에서 중공군 12개 사단의 포위망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의 매서운 칼바람 속을 뚫고, 1개 사단 전 병력과 장비를 육로를 통해 흥남까지 고스란히 철수했던 무적의 부대가 바로 미 해병대였다. 더욱이 한국 해병대는 그런 미 해병대를 마치 큰형님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대하며 무한한 존경심과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막강한 미 해병대도 어쩌지 못하고 포기했던 도솔산 공격을 한국 해병대가 맡게 됐다.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와 교대해 도솔산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누구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했다.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 해병대가 포기한 도솔산 점령을 화력과 장비가 미군에 비해 월등히 부족한 한국 해병대가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걱정부터 앞섰다. 여기에는 상하가 따로 없었다. 연대장 김대식 대령부터 대대장, 중대장 그리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신감하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한국 해병대도 전쟁발발 이후 이리-군산전투, 진동리전투, 낙동강전투,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원산상륙작전 등 6·25전쟁의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굵직굵직한 전투는 모두 체험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 해병대는 미국 종군기자로부터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별호(別號)를 얻을 만큼 뛰어난 전투기량을 과시했다. 그럼에도 미 해병대도 해내지 못한 도솔산 전투를 한국 해병대가 어떻게 해낼 수가 있을까하고 염려했다. 아마 여기서 한국 해병대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명확하다. 오늘날의 해병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해병대는 나약하지도 않았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상급부대의 명령에 따라 도솔산 공격에 임했다. 막상 도솔산을 공격하려고 하니 예상했던 대로 쉽지는 않았다. 공격해야하는 해병대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북한군 최정예부대로 이름난 5군단 예하의 12사단과 32사단이 좁고 칼날처럼 험준한 암석지대를 배경으로 산기슭의 구석구석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길목마다 지뢰를 빼곡히 매설해 놓아 접근을 어렵게 했고, 여기에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군이 밑에서 위를 향해 힘겹게 올라오는 해병대를 상대했으니, 한국 해병대가 겪어야 될 희생과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전투는 자연스럽게 험준한 산악지형을 배경으로 위에서 방어하는 북한군은 단연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반면 위를 쳐다보며 공격해 들어가는 한국 해병대는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

 

미국도 포기한 전투 승리 이끌어

그렇다고 언제까지 ‘탓’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제 모든 눈과 귀는 한국 해병대에 쏠렸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유엔군사령관 그리고 워싱턴에서까지 도솔산 전투의 향배에 주목하게 됐다. 한국 해병대도 결의를 다지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김대식 연대장은 “미 해병대가 못한 일을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며 움츠려있던 부하장병들을 다독였다. 공격계획도 꼼꼼히 점검했다. 공격개시선에서 최종목표인 도솔산에 이르기까지 미 해병대가 이미 선정해 놓은 24개의 목표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리고 작전을 개시했다.

이때가 바로 1951년 6월 4일이다. 이때부터 한국 해병대는 6월 20일까지 17일간, 험준하기로 이름난 도솔산의 가파른 능선자락을 기어오르며 피와 땀으로 얼룩진 혈전을 치렀다. 인명손실이 많은 주간공격이 막히자, 6월 11일 새벽부터는 야음을 이용한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적의 철조망과 험준한 산악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적의 시야기 가려진 틈을 이용한 야간작전은 주효했다. 여기에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고 아군 희생을 줄이기 위해 특공대도 운용했다. 적보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려면 그들보다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해야 했다. 특공대원들은 대검 한 자루와 수류탄 두 발을 들고 오로지 전우애와 애국심에 의지해 낮은 포복으로 전진해 목표를 하나씩 공략해 나갔다. 이때 소대장들은 앞장서 지휘했다. 병사들은 그런 소대장을 따라 적진으로 돌진했다. 목숨 같은 것은 생각지 않았다. 전우를 살리고 부대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견고하기만 하던 북한군의 방어진지도 해병들의 목숨을 건 투혼에 하나둘씩 무너졌다. 고지를 빼앗을 때마다 해병들의 만세소리가 능선을 타고 골짜기에 울려 펴졌다. 대신 해병대가 스쳐간 능선과 골짜기에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곳 저곳에 쓰려진 해병대원들의 시신들이 벌목장의 나무토막처럼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 수가 수 백명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해병들은 전투 중간에 전몰한 전우들을 위해 거목(巨木)의 줄기에다 대검으로 ‘충령비(忠靈碑)’라 새기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렇지 않고는 앞서간 전우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대대장·중대장·소대장들도 총상을 입고 여기저기서 쓰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후송을 거부한 채, 이를 악물어가며 부대를 지휘했다. 해병대는 도솔산에서 모두 그렇게 싸웠다. 그렇게 해서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도 포기한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사가들은 이를 ‘해병혼(海兵魂)’이라고 부른다.

한국 해병대의 도솔산 전투의 승리에 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맨 먼저 달려와 승전축하와 함께 부대표창을 했다.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도 ‘무적해병(無敵海兵)’의 휘호와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여했다.

이로써 한국 해병대는 전사에 찬란히 빛나는 뛰어난 전공을 세우며, 오늘날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통의 ‘무적해병’으로 우뚝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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