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남쪽에서부터 올라온다. 2월 중순을 넘어가는 경남 창원은 조금씩 훈풍이 섞이고 있는 중이다. 창원 의창구 언덕 위에 자리잡은 푸른요양병원에서 김상길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이사를 만났다. 15년간 상이군경회 경남지회장을 지낸 그가 최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을 기부해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클럽 회원이 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다.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그의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푸른요양병원은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박종길 회장 주도하에 김 이사가 함께 상당한 재산을 들여 세운 재단이다.)

“이제 내 삶을 정리하면서 우리 사회에 무언가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며 전우들과 후배들의 희생을 지켜보면서, 다시 이 사회에서 열심히 살았던 상이군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고민을 하던 끝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1억 원을 기부하면 주어지는 아너 소사이어티 클럽 회원 자격. 물론 명예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귀한 기부는 함께 사는 사회를 향한 희망의 싹을 틔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손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김상길 이사는 최근 상이군경회와 그의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에도 각각 1억 원씩의 기금을 다시 기부했다. 적지 않은 기부금이지만 그는 흔쾌히 결정했다. 내가 움켜쥐고 있기보다 필요한 곳에서 제 역할을 하며 그의 기부가 빛이 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상이군경회를 생각하면 그는 월남전 참전 당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76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총알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소대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귀국해 진해해군병원에 7개월이나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지요. 제가 귀국한 이후 전투가 계속되면서 적의 매복에 걸린 우리 소대원들이 거의 희생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실패한 소대장.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작은 기부’는 전장에서 상처를 입은 전우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다.

김 이사의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에 기부한 1억 원은 모교의 상징공원인 ‘전사자 공원’의 리모델링을 위해 써달라고 요청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지나게 되는 이곳이 너무 노후화돼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전사자 거의 대부분이 월남전 참전자인 저의 전우와 후배들이라 이들의 희생을 고귀하게 기리고, 이곳을 거쳐 가는 분들께 좋은 교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멋진 전투를 치르고 조국의 별이 된 전사자들에게 훌륭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의 손을 거쳐 새로 단장된 공원은 그가 스스로 말하는 ‘실패한 소대장’이 바치는 고백록 정도로 남을 수 있을까.

되돌아보면 그는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의로 해사에 입학해 장교 임관 후 월남전에 참전했고, 부상으로 꿈을 접는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지역사회와 전우들을 위한 지원은 후배들에게 귀감으로 남게 됐다.

제대 후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한 김 이사는 일본계 기업에서 일하다, 무역회사를 거쳐 식품회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산업화 시대의 한복판을 달려왔다.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 기여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때였다.

 

 

▲ 평생 우정. 김상길 이사는 푸른요양병원의 행정원장으로, 박종길 무공수훈자회장은 푸른요양병원의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평생을 바쳐 세운 병원 재활센터에서 두 사람이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때 만난 동지가 박종길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장이다. 둘은 함께 장교로 군 복무를 했고 월남전에 참전을 한데다 지역에서 같은 생각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의기투합’하기가 쉬웠다.

기업 운영의 한계를 느끼던 두 사람은 전쟁의 상처를 입은 국가유공자들과 전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2007년 의료법인 창아의료재단의 설립이다. 박종길 회장이 자신의 재산을 전액 재단에 출연하면서 이사장을 맡았고 함께 뜻을 보탠 김 이사가 병원의 행정원장으로 참여했다.

2008년 푸른노인전문병원이 개원하면서 이 사업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국가보훈처 지정 경남지역 유일의 요양병원이 됐고, 지난해 4월 600병상 규모의 신관이 완성되면서 두 사람의 꿈은 드디어 기대했던 결실을 맺게 됐다.

이제 ‘푸른요양병원’은 병상의 25% 이상을 국가유공자가 이용하는 보훈가족 전문병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이 병원은 병실과 치료실, 휴게시설 등 모든 시설이 국내 최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 병원을 찾는 사람은 호텔 수준의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모두 박종길 회장과 김 이사(행정원장)의 깊은 마음과 뜻이 오롯이 바쳐진 결과이다.

“기부를 하고 나서 오히려 더욱 넉넉해진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전쟁, 사업, 국가유공자들과 함께 걸어왔던 길, 이제 모두 함께 나누며 편안한 표정으로 이웃과 함께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작은 행동이 또한 우리 사회의 기부문화의 확산, 나누는 삶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병원을 거닐며 실무자들과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서 평생을 국가유공자로 이웃과 함께하며 살아온 사람의 따뜻함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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