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6일과 7일 양일간 열린 국제보훈워크숍은 각국의 경험과 현안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보훈정책의 발전을 도모하는 공감의 장이었다. 특히 첫날 주제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의 및 정전협정과 유엔사령부의 역할’은 세대를 넘어 6·25전쟁의 의의와 교훈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토론자들은 “6·25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유엔이 그 위상을 확보하는 한편, 이후 세계평화를 위한 기본 질서가 확립됐다는 측면에서 6·25전쟁과 유엔참전의 의의를 적극 평가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의

6·25전쟁은 시종일관 국제적 환경과 틀 속에서 이루어진 ‘세계대전이자 국제전쟁’이었다. 국제공산세력의 전쟁모의에서부터 유엔의 참전과 중소의 개입 그리고 전쟁종결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국제사회는 직접 관여해 해결했다.

특히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립한 냉전 상황에서 다국적 국가가 참여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최초의 ‘국제적 열전’이었고, 유엔 창설 이래 국제평화를 파괴한 국제 공산주의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가동해 유엔군이 대거 파병된 ‘유엔의 전쟁’이었다.

 

국제적 차원의 성격과 특징

6·25전쟁은 전쟁모의 단계부터 남침, 그리고 전쟁수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 등 국제공산주의 세력이 적극 개입한 국제전쟁이었다. 국제공산주의 세력들은 단순히 대한민국 국군의 능력만을 고려해 남침하지 않았다. 공산세력들은 국제환경이 그들에게 군사적으로 유리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바로 주한미군 철수(1949.06),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1949.08), 중국대륙의 공산화(1949.10),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선언인 이른바 ‘애치슨 선언’(1950.01) 등을 주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대한민국에서의 전쟁발발 상황은 전쟁개시 약 6시간 만에 워싱턴에 긴급 보고됐다. 이는 곧 유엔사무총장에게 보고됐다. 북한의 전면공격을 보고받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는 “이것은 유엔헌장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일갈하며, 사태 해결을 위한 조치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에 발 벗고 나섰다. 워싱턴의 미 국무부도 주한미국대사 무초로부터 한국에서의 전쟁발발에 대한 긴급전문을 받고, 한국사태의 신속한 해결을 위한 조치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6·25전쟁은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을 돕는 자유진영과 북한을 지원하는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싸운 국제 전쟁이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6·25전쟁에는 남북한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온 유엔의 전투부대파병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과 소련 등 25개국이 직접 참전했고, 대한민국을 돕는 물자지원국 39개국 등 64개국이 참여했다.

지역적으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모든 대륙의 국가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참전했고, 인종적으로도 백인·흑인·황인종들이 모두 참전한 세계전쟁이었다.

6·25전쟁에서는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유엔군사령부와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조중연합 사령부가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따라서 이들 사령부를 통제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닌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소련의 모스크바와 중국의 베이징이었다. 자유진영의 전쟁지도부는 백악관과 펜타곤이 있는 워싱턴과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이었다. 반면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군사지휘부는 소련의 스탈린이 있는 모스크바와 마오쩌둥이 있는 베이징이었다.

 

세계사에 미친 영향과 의의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중 과연 누가 정치적·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될 것인가 하는, 보다 거시적인 국제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전후 그들의 헤게모니를 위한 대척점이 됐다.

6·25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국제질서의 주도권과 이데올로기의 자존심을 놓고 벌이는 일대 싸움판이었다. 결과의 향배에 따라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은 전후 구축했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계속 구가할 수 있었고, 반면에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소련은 세계 공산화 팽창정책에 한층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할 수 없는 중대사였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국제평화와 안전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토대를 6·25전쟁을 통해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게 됐다.

6·25전쟁 당시 유엔은 창설된 지 5년밖에 안 된 신생아였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던 유엔이 자칫 6·25전쟁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유엔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전철을 밟을 것이 분명했다. 국제사회는 그런 참담한 결과가 오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유엔의 무력화는 곧 시계를 다시 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엔의 무력화를 막고 강한 유엔이 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 중심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리, 그리고 자유 우방국가들이 있었다.

이처럼 유엔이 오늘날까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유엔이 맞은 최초의 위기이자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에서 국제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집단안전보장을 발동하는 강력한 조치를 통해 유엔의 권위를 올바르게 확립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엔이 소련에 끌려 나약하거나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면 오늘날의 유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6·25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더욱 결속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6·25전쟁을 통해 양 진영은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결속을 위해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미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NATO)를 강화하고,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도 형성해 나갔다. 소련도 동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바르사뱌조약기구를 결성하여 나토에 대항했다. 중국과 북한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미국은 대한민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어 미국은 6·25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반공국가들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일본을 제외하고 태평양전쟁에서 같이 싸웠던 연합국들이 대부분 포함됐다.

1951년 8월 30일에는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 1951년 9월 8일에는 미·일 안보조약, 1951년 9월 1일에는 미국·호주·뉴질랜드 간의 앤저스(ANZUS)조약, 1954년 12월 2일에는 미·대만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1954년 9월 8일에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처럼 양자 또는 다자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태평양지역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지역 내의 반공국가들과 양자 또는 다자간동맹을 맺게 됨으로써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태평양동맹’이 형성됐다. 이러한 태평양동맹체 형성에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6·25전쟁이었다.

그 결과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소련의 공산팽창정책에 맞서며 추구해 왔던 대소봉쇄정책이 태평양지역에도 적용됐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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