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2월, 피난민들이 각국에서 보낸 구호물자를 받고 있다.

그6·25전쟁은 국제전쟁이면서 후방전쟁이었다. 전선에서는 국군들이 연일 국가수호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후방의 국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는 생존싸움을 치렀다. 후방에는 힘없고 배고픈 자들이 넘쳐났다. 고향을 버리고 온 피란민,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 가족과 헤어진 노약자들이 거리를 채웠다.

전선은 전국을 강타하며 폐허로 만들었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산업시설과 국가기간시설은 철저히 파괴됐다. 쓸 만한 땅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식량이 나올 농토도 파괴되거나, 남아 있는 농토도 농사지을 장정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선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노동력이 절대 부족했다.

국제사회의 도움만이 해결책이었다. 유엔회원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와 국제기구 그리고 단체들이 한국의 어려움을 알고 발 벗고 나섰다. 이른바 대한민국 살리기에 너도나도 앞장섰다. 세계 90개 국가 중 63개국이 대한민국을 도왔다.

세계는 한국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전선의 군인들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후방의 국민들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먹을 것, 입을 것, 피해복구에 필요한 물자, 의약품, 생활용품 등 전시 당장 생존에 필요한 것과 전후에 살아갈 것들을 대한민국에 보내고, 또 보냈다. 그렇지 못한 국가 및 단체에서는 돈을 모아 보냈다. 그들의 도움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혹독했던 전시의 궁핍한 생활과 어려운 피난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들 유엔 과 국제사회 그리고 국제기구와 단체들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을 살려냈다.

 

전재민 구호활동

그6·25전쟁 초기부터 유엔 및 국제사회가 전개한 구호사업은 수백만 명에 달한 전쟁피난민에 대한 구호활동이었다. 이들은 전재민(戰災民, war sufferers)을 피난민촌에 수용하거나 피난민을 위해 급식소를 설치하거나, 전염병을 위한 방역과 환자에 대한 치료 등을 실시했다. 당시 한국정부도 대구와 부산 등 60여 곳에 피란민수용소를 설치하면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50년 12월 초 한만국경선으로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으로 철수하자 북한 공산치하에서 고생했던 북한주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피난민 구호는 새로운 문제로 대두됐다. 당시 피난민은 그 숫자가 너무 많아 그들의 생활상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설상가상으로 1951년 1·4후퇴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넘겨주고 한강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자, 또 다시 대규모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급식과 의류지원 그리고 이들에 대한 질병예방은 전선에서의 전투보다 더 치열했고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그러나 유엔에서도 이들 전재민을 모두 구제할 수 없었다. 도움의 손길이 피난민의 숫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부득이 유엔민사원조사령부(UNCACK)에 등록된 전재민들만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숫자가 무려 100만 명에 달했다. 그렇지만 이들 전재민에게도 1일 약 450그램의 곡물만 지급해야 했다. 궁핍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된 전재민들에게만 해당됐다. 이들로는 고아원에 수용된 전쟁고아, 전쟁미망인, 실업여성, 그리고 노약자들이었다. 그 밖의 난민들에게는 겨우 연명하기도 어려운 1일 150~300그램의 곡물을 지급했다.

 

피란민들에 대한 정착 지원

유엔 및 국제사회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위한 정착사업을 지원했다. 정착사업의 대상자는 북한에서 공산치하가 싫어 넘어온 월남자와 미수복지구(未收復地區) 주민들로서 귀향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전쟁포로들 중 남한에 잔류하기를 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와 유엔군사령부는 피난민들에게 임시피난소를 신축할 수 있도록 목재와 천막 그리고 물자를 지원했다. 그리고 민간구호계획에 따라 지방의 가옥을 재건하기 위해 수입된 다량의 목재를 여러 항구를 통해 각 지역으로 분배함으로써 주택난을 완화시켰다.

특히 유엔군사령부는 전선이 38선에서 일대에서 안정된 1952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귀가작전'을 전개해, 군사보안상의 이유로 유엔군에 수용돼 있던 2만7,000명의 민간인 억류자들을 귀가시켜 복구사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들은 남한출신 민간인으로 전투지역에서 붙잡히거나, 강제로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 전투지역에서 소개된 신원 미상의 피난민 낙오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양곡·생선통조림·소금으로 채워진 전투식량(레이션)을 30일분 지급했다. 또한 그 해 11월에도 ‘추수감사절 작전'을 통해 1,641명의 수감자를 추가로 귀가 조치했다.

특히 북한지역에서 온 피난민과 접적지역에서 소개(疏開)된 주민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거주 지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는 농립부의 협조를 얻어 강원도 화천군과 충청도 지역에서 이뤄졌는데, 이때 이들에게는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하고, 놀고 있는 땅도 개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1953년까지 약 35만 명의 난민들이 정착하게 됐다. 이때 유엔민사원조사령부에서는 이들에게 종자·곡물·농기구·가축을 제공하며 정착을 도왔다.

 

보건 및 의료시설 지원

유엔민사원조사령부가 전개한 전재민 구호활동 가운데 대규모로 추진된 사업 중의 하나가 보건 및 의료지원이다. 여기에는 피난민과 주민을 위한 방역사업, 의료시설 건축, 의료장비와 물품지원, 의료 인력지원 등이 포함된다. 그 중 방역사업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창궐하기 쉬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실시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전염병 발병을 우려해 1951년 8월까지 남한인구의 70%에 해당하는 주민들에게 천연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예방접종을 실시했고, 민간인 치료를 돕기 위해 349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기재를 도입해 79개 병원과 12개 치료소를 설치해 운용했다. 또한 결핵퇴치를 위해 BCG 예방접종도 실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취약한 영양 상태로 인해 민간인 환자가 급증했다.

이에 미8군사령부는 1953년 3월, 전선의 소강상태로 인해 군인 환자수가 감소하자, 서울의 이탈리아 적십자병원과 부산의 스웨덴 적십자병원을 민간인을 위한 전문치료병원으로 전환했다. 또한 유엔민사원조사령부는 전쟁으로 파손된 한국의 의료시설을 개선 및 보수해 주었고, 이들 시설에 의료장비와 물품을 제공했고, 부족한 의료 인력도 지원했다.

직업훈련과 농사지도

유엔민사원조사령부는 직업훈련과 농사지도도 실시했다. 당시 한국은 농업국이었다. 국민총생산의 40%가 농업이라는 점에서 전쟁으로 인한 밭과 논의 황폐화, 농기구의 망실 등은 심각한 식량부족을 낳았다. 1953년 유엔민사원조사령부가 도입한 151만 톤 가운데 51만 톤이 식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식량 확보는 시급한 문제였다. 농업국가인 한국이 구호곡물을 도입해야 했던 주요 요인은 전쟁의 영향 탓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농업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이다. 이에 유엔민사원조사령부에서는 비료 도입은 물론이고, 농민들에게 농사기술을 보급함으로써 곡물수확량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유엔민사원조사령부는 1953년에 38만 톤의 비료를 도입해 지원했다.

이렇듯 6·25전쟁은 전선에서 군인들만의 전쟁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살기위한 국민들의 전쟁이 농촌과 도시할 것 없이 날마다 곳곳에서 벌어졌다. 전선에서의 전투가 나라를 지키는 국가수호의 전쟁이었다면, 후방에서의 의식주를 위한 싸움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운 전투가 사나이들의 ‘남성적 전쟁’이었다면, 후방에서의 전쟁은 자식과 부모들을 먹여 살리는 모성애에 바탕을 둔 여성적 전쟁’으로 비견됐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유엔군의 군사적 지원에 의해 지켜졌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유엔 및 국제사회의 온정과 따뜻한 구호의 손길에 의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때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다루어졌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번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상당기간 늦춰졌을 것이다. <끝>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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