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당시 시민·학생들이 시가행진을 벌이며 대한문 앞을 지나가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총검 아래 숨죽여 살아왔던 온 겨레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삼천리 방방곡곡 태극기가 물결쳤던 그날은 자주독립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전 세계인들에게 선포하는 위대한 날이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선열들은 그날을 어떻게 준비하고 치러냈을까? 3·1독립운동 준비 과정에서부터 독립 만세 현장까지, 서울 시내 곳곳 만세운동의 현장은 그날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 의미를 웅변하며 있었다.

3·1독립운동 불씨 놓은 중앙고 숙직실

종로구 계동, 창덕궁 담장을 따라 올라가면 담쟁이덩굴이 어울리는 고색창연한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나타난다. 본관 오른편 언덕에 있는 대강당 앞이 3·1독립운동의 불씨를 놓은 숙직실이 있었던 곳이다.

이 숙직실은 1919년 1월, 2·8독립선언을 앞두고 일본 유학생들을 대표해 밀사격으로 파견된 송계백이 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을 만나 일본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전달한 곳이다. 여기서 그는 사각모 안에 숨겨온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이후 송진우 등은 기독교계, 불교계, 천도교계 지도자들과 상의해 3·1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작은 숙직실에서 단 세 명이 모였지만 이날의 모임은 숨죽여 살아왔던 겨레의 혼을 일으켜 세운 3·1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 새봄을 앞두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교정 오른쪽에는 당시를 기념해 3·1운동 책원비가 세워져 있고, 세 선생이 모였던 숙직실은 삼일기념관으로 복원돼 있다.

학생대표 거사를 숙의한 승동교회

학생대표들이 모임을 갖던 승동교회 표지석.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올라가면 왼쪽 골목길 안쪽에 승동교회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3·1독립운동을 앞두고 학생대표들이 모여 거사를 숙의한 곳이다.

일제의 감시가 극심했던 시절, 종교 활동은 학생들의 모임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거사를 10여 일 앞둔 2월 20일, 당시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이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이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했다. 이들은 사흘 뒤인 23일 다시 교회에 모여 학생대표들이 만들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고 범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할 것을 결의했다. 3·1독립운동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던 학생들의 참여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교회 앞마당 표지석 오른편으로 보이는 건물 한편에는 당시 학생들이 모임을 갖던 장소가 확인되는데 선언일 하루 전, 학생대표들은 민족대표 33인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나눠 들고 거사일에 약속된 곳을 향해 흩어졌다.

민족대표 한 자리에 손병희 선생 집터

 3·1독립운동 전일 33인 민족대표들이 모였던 손병희 선생 집터 표지석. 

삼일대로가 시작되는 안국동로터리에서 북촌 쪽을 향하다보면 북촌박물관 옆에 손병희 선생 집터가 나온다. 관광 명소답게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이곳도 독립운동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독립선언 전날인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중에서 23인은 이곳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익히는 한편 안전을 고려해 당초 탑골공원으로 정해졌던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하는 등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손병희 선생 집터는 이제 박물관을 등지고 표지석 하나로 남아 있다.

기독교계 대표 정한 정동제일교회

대한문 왼쪽, 높다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3·1독립운동을 앞두고 학생대표와 기독교대표가 회합을 갖던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학생대표들이 2월 25~26일 모임을 갖고 3·1독립운동과 그 이후 연계 방안을 수립했고, 26~27일 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여 민족대표로 추대할 기독교대표를 선정했다.

3·1독립운동을 준비했던 정동제일교회는 1920년 이화여고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이후 장례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이필주 목사 사택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독립선언서 극비리 인쇄한 보성사

수송동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이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자리다. 보성사는 당시 소유주였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특명으로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극비리에 족보책으로 위장한 독립선언서 3만여 매를 인쇄했고, 거사 당일에는 조선독립신문 제1호를 발간한 곳이다.

당시 30평 2층 벽돌로 지어진 보성사 건물은 3·1독립운동 이후 일경에 의해 폐쇄됐다가 6월 28일 강제 소각된 이후 터만 남아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조계사 뒤에 조성된 수송공원에는 이곳에 보성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을 비롯한 기념 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다.

현재 보성사터는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답게 여전히 도심 뒤편에 서 있지만 독립의 열망을 담아 인쇄기를 돌린 그날의 이야기는 아직도 끊이지 않고 들리는 듯하다.

독립 선언 낭독 현장 태화관

인사동에서 종로 방향으로 걷다 만나는 태화관은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대한독립을 선포하고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지금은 재개발돼 그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비석이 세워져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장소는 이후 남감리회가 매수해 태화기독교사회 관으로 활용했지만 일제가 징발해 흔적을 없애 버리려 했다. 해방 이후 한국 감리교회가 다시 확보해 사회사업 센터로 사용해 오고 있으며, 지난 2019년 8월 15일 서울시가 광복절에 맞춰 태화관 빌딩 옆을 3·1독립선언광장으로 조성해 일반에 개방했다.

3·1독립운동의 진원지 탑골공원

비밀리에 진행됐던 3·1독립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장소가 바로 탑골공원이었다.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도 넓어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기에 3·1독립운동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당일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의 수는 5,000여 명을 넘었고 시민들도 함께 참여했다.

갑작스런 장소 변경으로 독립선언서는 태화관에서 낭독됐지만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서 긴장된 분위기에서 독립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낭독된 독립선언서가 탑골공원으로 전달되자 바로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정재용 지사가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정 지사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 만세’라는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고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섰다. 그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탑골공원은 주출입구인 삼일문 오른쪽으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울 시내 곳곳의 만세 행렬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했던 서대문 형무소 옥사의 현재 모습.

독립선언 이후 탑골공원에 모였던 인파는 종로와 동대문 두 갈래로 나뉘어 시가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종로 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보신각 앞 광장에서 다시 한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행렬은 보신각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남대문, 정동 이화학당, 서대문 등을 거쳐 충무로로 향했다. 다른 한 갈래는 보신각에서 무교동, 대한문 등을 거쳐 충무로(당시 본정)로 모였다. 동대문 방향으로 갔던 행렬 역시 창덕궁 등을 거쳐 충무로로 향했다.

이날 오후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만났다 흩어지기를 반복한 시위대는 남산 자락, 조선총독부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자 했다. 시위대가 충무로에 집결하자 일제는 조선헌병대를 동원, 총검으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날 전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인사들은 저마다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고향으로 향하면서 독립운동의 열기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한문 앞 광장의 현재 모습.

3·1독립운동 이후 10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날 시가행진을 벌였던 서울 시내 거리들은 그 시간만큼의 역사를 품어내며 많은 변화를 거쳤다. 조그만 단층집이 있었던 거리에는 수 십층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전차가 다녔던 길 아래로는 10여 개의 전철 노선이 들어섰다.

시위대가 행진한 거리의 풍경과 오가는 사람도 모두 달라졌지만 역사를 간직한 서울의 거리와 광장은 그날의 함성을 아직 잊지 않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역사적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특별취재반>

서울 독립운동 관련 주요 현충시설·기념시설

백범김구기념관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안.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부장, 주석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 중앙.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른 악명 높았던 서대문형무소 구 보안과 건물을 보수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탑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아래.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이를 기념해 1999년 3월 1일 기념탑을 건립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중구 남대문5가 남산도서관 앞.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 조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민족영웅 안중근 의사를 기념해 세웠다.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중구 구 서울역사 앞.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조선총독부에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탑골공원 종로구 종로2가 교차로. 우리나라 최초로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 입구. 1907년 11월 망우리 일대에서 13도 창의군 선발대 300여 명이 일본군과 혈전을 치른 것을 기념하고 항일의병의 구국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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