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선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공격해 한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선생은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동휘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선생은 1920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선생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해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라고 주장하며 화합할 것을 역설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 지지파와 정부 옹호파를 중재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으나 결렬되자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하고 간도지역 정의·신민·참의 3부를 설득해 결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무령 김구 체제에서는 군무장에, 이동녕 체제에서는 외무장과 군무장에 임명돼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힘썼다.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다 1939년 상해에서 지병으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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