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호국·민주’는 같은 곳을 지향한다. 각각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역사의 부름에 응답한 영웅들은 ‘독립·호국·민주’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나라사랑을 실천했다. 따라서 나라사랑은 시대를 초월해 이 땅을 지키고 일으켜 세운 강력한 동력이며, 이 나라를 하나로 묶어낼 중심이기도 하다. <나라사랑>은 2024년 새 연간기획 ‘독립·호국·민주, 나라사랑 현장을 가다’ 연재를 통해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우리 민족은 일제 패망 이후 해방의 기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분단과 전쟁이라는 크나큰 아픔을 연이어 겪어야 했다. 특히 경기 북부 지역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을 가장 먼저 겪었던 곳이자 정전 협정이 이뤄진 곳으로, 전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영웅들의 희생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국군과 유엔참전용사들이 피 흘리며 싸웠던 경기 북부 호국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았다.

6·25전쟁 개전 당일 파괴된 포천 전투진지.
6·25전쟁 개전 당일 파괴된 포천 전투진지.

포천 전투진지, 격전의 마지막 증인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철원을 연결하는 43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포천 기지리 6·25전투진지(방어벙커)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이 전투진지는 38선을 방어하기 위해 1948년에 세워진 네 개의 전투진지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세 개는 격전 중에 파괴돼 이제는 흔적조차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3사단이 43번 국도를 따라 포천 방면으로 남하할 당시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제9연대 2대대는 포천 전투진지를 중심으로 로켓포 등을 동원해 치열하게 싸우며 적의 남하를 4시간이나 지연시켰다. 오늘 남은 전투진지는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90센티미터 두께로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격전의 중심에 있어서인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흐린 조명에 의지해 북한군의 탱크부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철근 사이로 누군가 가져다 놓은 조화가 전사한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독개다리. 현재 일부 구간만 복원돼 있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독개다리. 현재 일부 구간만 복원돼 있다.

파주 임진각, 전쟁에서 대화까지

겨울 안개가 나지막이 깔린 새벽, 북을 향해 달리는 자유로의 바람이 선선하다. 그러나 길을 따라 철책이 둘러쳐진 임진강 너머로 흐릿하게 북한땅이 보이는 이곳은 6·25전쟁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격전의 현장이다.

특히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약 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임진각은 남북을 관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이제는 분단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국군 제1사단이 초기전투, 신정공세(1·4후퇴) 등의 전투에서 공산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곳이지만 각종 남북회담이 열렸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임진각에는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 현장을 증언하는 유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독개다리이다. 일부 구간만 복원된 독개다리에 올라서면 전쟁 당시 총탄 자국이 선명히 남은 교각들이 보인다. 독개다리 입구에는 폭격으로 탈선돼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비무장지대에 방치됐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세월을 넘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1953년 당시 국군과 유엔군 포로 1만2,773명이 걸어서 귀환한 ‘자유의 다리’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임진각에는 전쟁 유적 외에도 유엔군을 상징해 영어 알파벳 엔(N)자 모양으로 세워진 임진강지구 전적비, 수십 개의 태극기와 성조기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미국군 참전비와 미군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 동상, 해병대 장단 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 등이 호국영령들의 위훈을 기리고 있다.

1951년 2월부터 6월까지는 6·25전쟁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전투가 잇따라 치러지는 시기였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계속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2월 양평 지평리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중공군을 이길 수 있는 필승의 비결을 터득했다. 아군은 이를 바탕으로 중공군이 6·25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한 5차 공세(춘계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신속히 반격해 중공군을 상대로 최대의 전과를 올리고 38선 부근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지평리 전투 당시 미군이 정찰과 부상자 후송을 위해 운용했던 임시활주로.
지평리 전투 당시 미군이 정찰과 부상자 후송을 위해 운용했던 임시활주로.
활주로 인근에서 프랑스대대 지휘소로 사용됐던 지평양조장 현재 모습.
활주로 인근에서 프랑스대대 지휘소로 사용됐던 지평양조장 현재 모습.

지평리 전투의 생생한 흔적

6·25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1951년 들어서며 전략적 차원에서 한반도 철수를 고려하던 시기, 상황을 극전으로 반전시킨 결정적 승리였다.

1951년 2월 13~15일까지 3일간 중공군은 39군 3개 사단 5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미 제23연대와 배속된 프랑스 대대 등 5,6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던 지평리로 쳐들어왔다. 유엔군은 지평면사무소에 미 제23연대 지휘부를, 지평양조장에는 프랑스대대 지휘부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방어선을 둘렀다. 백병전을 불사하는 결사적인 투혼에 중공군은 10배가 넘는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한반도 철수론을 일거에 불식시킨 대승이었다.

현재 지평리에는 지평리 전투에서 미 제23연대 제1대대가 지키고 있던 동북쪽 지역에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이 건립돼 지평리 전투 현장을 내려다보듯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기념관 3층 전망대에서는 지평리 전투 현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고, 기념관에는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가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격전이 치러진 지평역 잔디광장에는 프랑스군이 싸웠던 전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월의 흔적을 새기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중공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나흘 동안 전선을 지킨 설마리 전투를 기념해 세운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중공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나흘 동안 전선을 지킨 설마리 전투를 기념해 세운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파주 설마리 전투 현장의 베레모

임진각 서북쪽 23킬로미터 지점에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의 치열했던 당시를 떠올리는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산들이 마치 호위하듯이 둘러싼 고지의 아래쪽이다. 영국군 글로스터대대가 1951년 4월 22일에서 25일까지 나흘 동안 10배도 넘는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버텨낸 곳이 바로 이곳 235고지이다. 당시 용사들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버텨준 덕에 유엔군 주력부대는 안전하게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었고, 아군은 서울 방어를 위한 천금 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용사들이 목숨 바쳐 싸웠던 이곳 추모공원에는 그날의 상처를 싸매듯 간밤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입구는 영국군을 상징하는 베레모 조형물과 함께 영국군이 참전에서 귀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17면으로 된 반원형 추모벽이 눈길을 끈다.

조형물 옆으로 조성된 좁고 길다란 잔디밭 위에는 글로스터 대원들이 행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데, 세월이 흐르며 푸른 녹이 슬었지만 강인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위로 백전불굴의 의지가 느껴진다.

설마천 위에 놓인 글로스터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계단 위 벽면에 설치된 설마리 전투비가 글로스터 용사들의 희생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승전보 울린 가평 용문산 전투

6·25전쟁 기간 중, 국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군 제6사단의 용문산 전투이다. 이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개전 초기 춘천 지연전, 이천 지연전, 영천 포위전 등에서 연승을 이어가다 1951년 4월 화천 사창리 전투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게 됐지만 절치부심하며 전력을 재정비해 용문산에서 5월 공세에 나선 중공군을 물리친 전투다.

당시의 격전지는 오늘날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의 작은 마을로 변해 있다. 지금은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이곳에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용문산 전투 가평지구 전적비의 위용은 그날의 승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1951년 전투를 의미하는 19.51미터 높이로 서 있는 전적비의 중앙에 자리잡은 군인 동상의 눈빛이 아직 형형하다.

전적비 뒤편으로는 용문산 전투 승리를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썼던 파로호(破虜湖)를 탁본해 새긴 비석과 함께 6사단과 같이 싸웠던 미 제2사단 제72 탱크부대 전적비가 있다. 이와 함께 가평에는 영연방 참전기념비, 캐나다·뉴질랜드·호주 전투 기념비와 함께 미국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가평지구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동두천 벨기에·룩셈부르크 용사의 전장

동두천은 6·25전쟁 당시 38선에 인접해 있어 전쟁을 가장 먼저 겪었고, 전쟁 내내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진 곳. 이곳 소요산에서 벨기에·룩셈부르크대대가 첫 전투를 치렀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연합한 벨룩스대대는 1951년 3월 말경 동두천에 배치돼 중공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연천과 철원을 거쳐 김화로 이동하며 잇따라 전투를 치렀다.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소요산역 앞에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순백색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특별취재반>

경기 북부권 6·25전쟁 관련 주요 현충시설

△파주 임진각 독개다리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돼 교각만이 남아 있다.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영국군 글로스터대대의 희생과 헌신을 기려 설마리 전적지에 건립됐다.

△동두천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 벨기에·룩셈부르크대대의 첫 전투지였던 동두천 소요산 앞에 건립됐다.

△연천 장승천전투전적비 터키군 여단이 중공군을 상대로 펼친 작전을 기념해 세웠다.

△포천 기지리 6·25전투진지 6·25전쟁 개전 당일 격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가평 미국 한국전쟁참전기념비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해 세웠다. 가평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명비가 있다.

△가평 영연방참전기념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국연방 4개국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가평 용문산전투 가평지구전적비 국군 제6사단이 용문산전투 승전을 기리며 전적지인 가평군 설악면에 건립됐다.

△양평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중공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지평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해 세웠다.

△여주 그리스군참전비 6·25전쟁 당시 그리스군 대대가 중공군과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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