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육학년, 살구가 나는 여름이었다. 전북 고창 시골 마을에 살았던 나는 집에서 오리쯤 떨어진 흥덕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학교에 가려면 폭이 이십 미터쯤 되는 시내를 건너야 했다. 시내에 놓인 다리는 소나무 서너 개를 칡넝쿨로 엮어 만든 것이라 뛰어가면 흔들렸고 홍수라도 나면 떠내려갈 정도로 약했다.

하루는 중학교를 다니는 고모 둘과 함께 다리를 건너는데 장난기가 동한 고모들이 나를 다리 한가운데 세워 두고는 양쪽에서 마구 흔들었다. 급기야 한 고모가 밀치는 바람에 그만 중심을 잃고 시냇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겁에 질린 나는 다리 교각을 손으로 잡고 올라가려 했지만 장마철이라 세차게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올라갈 수 없었다. 다른 고모가 가방끈을 내려줘 겨우 올라올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물에 젖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와 어머니가 왜 옷이 젖었냐고 물었다. 참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졌다.

그날 땅거미가 질 무렵, 고모 둘이 우리집 옆에 있는 우물로 물을 길러 왔다. 나는 우물 곁에 있는 살구나무 위로 몰래 올라가 나를 밀친 고모 물동이에는 돌멩이 세 개를, 나를 건져준 고모 물동이에는 살구 세 개를 살그머니 넣었다. 물을 길러 왔던 고모들이 돌아가고 얼마 후, 심술이 잔뜩 난 고모가 우리 집으로 쫓아오더니 “재덕이 이리 나와! 네가 내 물동이에 돌멩이 넣었지? 너 때문에 물을 다 버렸어”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무서워서 부엌으로 도망가서 할머니 뒤에 숨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물 항아리가 문제가 아니야 네가 귀한 우리 장손을 시냇물에 빠트렸다는데 무슨 장난이 그리 심하냐?”며 호통을 치셨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고모들이 다정히 대해줬다.

어느새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은 가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할머니의 빗자루 호통도 듣고 싶건만 이승 사람이 아니라 다시 들을 수 없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하지만 그 사랑은 내 가슴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어 항상 든든하다. 그 시절 장난은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아이들은 자연과 접하는 기회가 없어 정서적으로 메말라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고재덕 시인, 수필가 6·25전몰군경의 아들로 육군군수기지 사령부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했다. 2015년 수필춘추로 등단한 후 수필을 벗 삼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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