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지난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 확대 회담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 확대 회담을 하고 있다.

⑩ 정전 및 한미동맹 7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끝)

정전협정과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게재된 연간 기획 시리즈 ‘튼튼한 안보, 평화와 미래를 위한 전진’이 독자들의 성원 속에 이번 호로 끝을 맺는다. 10회에 걸친 시리즈를 통해 긴박했던 6·25전쟁의 결정적 장면을 되짚어보는 한편, 전쟁을 통해 맺어진 한미간의 혈맹 관계가 이제는 글로벌 전략적 동맹 관계로 성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리즈를 정리하며 정전 및 한미동맹 70년의 역사적 의미와 남겨진 과제를 살펴본다.

6·25전쟁과 정전협정

2023년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이다.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전협정은 많이 퇴색됐지만, 한미동맹은 오히려 진화하고 있다.

정전협정은 김일성의 적화통일 시도와 이에 대한 반작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김일성은 1949년 2월 소련 방문을 통해 스탈린을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 1950년 3월에는 무려 한 달 가까이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을 졸랐다. 스탈린은 세계 정세의 변화라는 큰 그림 속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1949년 4월 나토(NATO)가 창설됐기에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의 대소(對蘇) 압력 완화의 필요성, 1949년 8월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기에 미국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됐기에 한반도 적화통일을 통한 전 세계 공산주의화에 대한 가능성, 게다가 1950년 1월 미국의 에치슨 라인 선포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과 1950년 2월 중소동맹 조약이 체결됐기에 중국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스탈린의 승인이 떨어지자 김일성은 곧바로 북경을 찾아가 마오쩌둥의 동의마저 얻어냈다.

스탈린의 판단과는 달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주도의 유엔군을 창설해 즉각 개입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전투병을 파병했고 6개국이 의무부대를 파병했으며 39개국이 각종 물자를 지원했다. 연인원 194만 849명의 유엔군이 참전해 4만 669명이 전사했고, 10만 4,198명이 부상했으며, 5,372명이 실종됐다.

6·25전쟁은 8개월의 기동전과 29개월의 진지전으로 막을 내렸다. 전선에서 세력균형이 이뤄지자 휴전회담 논의가 급부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회담은 1951년 7월에 개최됐다. 포로 문제에 대한 유엔군 측의 ‘자유송환’ 주장과 공산군 측의 ‘강제송환’ 주장으로 정전협정이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새로 출범하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포로송환협정 체결이 임박했고 뒤따라 정전협정이 체결될 예정이었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안전보장조치 없이 정전협정만 체결되면 북한이 또다시 6·25전쟁을 일으킬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판단했다. 이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리고 갓 출범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도 미국의 안전보장조치 없는 정전협정 체결은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자 이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렸다. 자신의 동의 없이 정전협정을 체결할 수도 없거니와 체결한다고 하더라도 이 협정이 준수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벼랑 끝 전술이었다.

미국은 크게 당황했다. 결국 1953년 6월 25일 미 극동담당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특사 자격으로 급히 한국에 파견했다.

이 대통령은 로버트슨과 무려 12차례에 걸쳐 정전협정, 포로문제, 제네바 정치회의, 상호방위조약, 한국군 증강, 경제 원조 등을 의제로 회담했다. 그 결과 정전협정이 7월 27일 체결됐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변영태-덜레스 간에 8월 8일 경무대에서 가조인을 한데 이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역사적인 한미동맹이 출범하게 됐다.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의 의미

한반도 정전 체제가 70년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 북한이 정전협정만이라도 제대로 준수했더라면 남북한은 이미 정전협정을 넘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로운 통일을 달성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전 체제 무력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후해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를 와해시켰고, 1999년부터는 북방한계선(NLL) 무력화에 나섰다. 1·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사실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현재까지 무려 42만 건이 넘을 정도로 정전협정을 위반해 왔다.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위협, 그리고 정전협정 무력화 전략으로 최소한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정전 체제마저 위기에 처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남북한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것은 정전협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도 있고 비핵화 공동선언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이 문서는 한반도에 아무런 평화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정전협정과 다양한 한반도 합의서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해야 하지만, 오히려 한미동맹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한미동맹은 한국의 정치, 경제 및 군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미동맹은 북한의 재침을 억제하는 억제자의 역할과 지역 안정자의 역할을 해 왔다. 또한 한미동맹 덕분으로 한국은 미국의 유무상 원조와 함께 외국 자본과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국방비를 낮추어 경제발전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미동맹은 한국군에 대한 유·무형의 전력을 보강해 주는 조력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과제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날, 워싱턴에서는 16개 참전국 대표가 모여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유엔의 깃발 아래 다시 뭉치겠다는 약속이었다. 지난 11월 한·유엔사 회원국 장관급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면서 새삼 그 역사적 사실을 떠 올리게 되었다. 한·유엔사 회원국 장관급 회의의 공동성명은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의 정신과 약속이 변함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점과 “한국 안보를 위협하는 적대행위와 무력공격이 재개될 경우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재확인했다. 70년 전의 약속을 상기한 것이다.

유엔사는 정전협정 관리와 함께 연합사에 유엔사 회원국의 전력을 제공(Force Provider)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한국도 초청국(Host State)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유엔사 회원국에 참여할 필요성 검토와 함께 유엔사 참모부에 한국군을 파견할 필요도 있다. 또한 유엔사 회원국 확대를 위한 노력과 함께 회의가 정례화될 경우 전력 제공국의 수용절차 등 실행과제 등을 사전에 준비할 필요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유엔사 장관급 회의는 정전협정 유지와 함께 전쟁 억제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기제로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정전협정이 위기에 처하는 동안 오히려 한미동맹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미동맹 관계는 후견인-피후견인(patron-client) 관계였다. 그러나 한국이 압축성장을 달성하고 민주화까지 이루게 되자 한미관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탈냉전이 되면서 한미동맹은 군사분야에서 경제 및 첨단기술분야로, 한반도 차원에서 지역 및 세계적 차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의 주춧돌 위에 안보·산업·과학기술·문화·정보 동맹이라는 5개의 기둥을 세우고,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한미동맹은 대체 불가능한 귀중한 자산이다. 한국은 한미동맹 덕분에 6·25의 잿더미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3050클럽’에 세계 7번째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군사력도 세계 10위권 이내로 진입했다. 이런 하드 파워 못지않게 한류로 표현되는 소프트 파워도 강하다. 케이팝, 케이드라마, 케이푸드 등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6·25전쟁이 남긴 잿더미에서 출발했던 한국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원조를 받지 않으면 생계유지를 할 수 없었던 국가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원조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바뀐 것이다. 창의적이고 근면한 민족정신과 훌륭한 지도자, 그리고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가들을 만난 덕분이다. 그리고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한미동맹 덕분이다.

한미동맹은 현재뿐만 아니라 통일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혼란을 줄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달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또 다른 70년이 진행되는 동안 정전 체제가 사라지고 한국 주도의 평화 통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열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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