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주최하고 국가보훈부가 후원한 ‘정전협정·한미동맹 70주년 : 회고와 전망’ 세미나가 열렸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각에서 한미동맹 70주년을 바라본 김학준 인천대학교 이사장의 기조강연을 요약한다.

일제의 강점 아래 놓여 있었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방되면서 동시에 분단됐다. 당시 진행되던 미·소냉전에 남북 대결이 겹치면서 남에서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북에서는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동의와 중공 마오쩌둥의 호응을 얻어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전쟁을 시작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파병을 요청했으며, 트루먼은 유엔의 이름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 서방국가가 참전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인천 상륙작전을 통한 역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후퇴, 유엔군의 재반격 등 치열한 공방전 끝에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정전협정이 성립되며 쌍방은 포화를 멈췄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점은 정전협정이 70년을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세계 역사에서 정전협정이 이렇게 긴 세월을 거치며 존속한 사례가 없다. 이것은 한반도에서의 남북대결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나를 말해준다. 더구나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지속적으로 전진시켜왔고 핵무기공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랴! 그렇기에 ‘최종적 평화해결’의 길을 계속해서 찾되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의 기습적 남침을 겪으면서 한국 정부는 그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 미군의 조기철수를 꼽았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재침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개입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그것이 한미군사동맹의 체결을 미국 정부에게 요구하게 만들었다. 이 대통령의 요구에 미국 정부는 응하지 않았으나 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1953년 6월 18일에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휴전협상의 진전을 위협하자 미국 정부는 마침내 대통령 특사를 서울로 보내 한국정부와 이 문제를 협상했으며, 그 결과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원조조약이 성립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였다.

이 조약은 북한의 재침을 강력히 억제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평화 유지와 평화에 기초한 통일을 추구하는 받침목이 되고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사회안정과 경제발전 그리고 외교관계의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미동맹은 우리가 굳건히 지켜야 할 소중한 재산이다.

김학준 인천대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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