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 대원들이 혹한 속에서 행군을 하고 있다.
미 해병 대원들이 혹한 속에서 행군을 하고 있다.
미 해병 대원들이 콜세어 전투기가 중공군 지역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 해병 대원들이 콜세어 전투기가 중공군 지역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박물관에 세워진 장진호 전투 참전기념비.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박물관에 세워진 장진호 전투 참전기념비.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일 동안 함경남도 장진군 지역에서 치른 철수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며 승리를 목전에 둔 유엔군은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산악지대로 은밀히 침투한 중공군의 매복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중공군 7개 사단이 겹겹이 펼쳐놓은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했다. 작전 성공으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돼 동북 지방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었고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38선 돌파와 장진호 진격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전면적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1월 말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장진호 전투 이전 맥아더는 미 해병 제1사단으로 하여금 장진호 서쪽으로 진격해 평양을 거쳐 북진하는 미 제8군과 합류해 북한을 통일한다는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중공군의 1차 공세 이후 동쪽의 미 제10군단과 서쪽의 미 제8군의 전선 사이에는 80마일의 공백지대가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이를 해소하고자 미 제8군의 동측방을 엄호하는 작전을 미 제10군단에 지시했다. 미 제10군단의 주축인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를 거쳐 서북쪽으로 진격해 중공군에 압박을 가하면 미 제8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미군 지휘부는 이 일대의 중공군이 패잔병 부대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27일 오전 선두부대인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가 장진군 유담리에서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중공군의 박격포와 수류탄이 쏟아졌다. 중공군 제9병단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 제10군단이 공세작전을 시작할 무렵 중국은 장진호 주변 일대에 제9병단 예하 20·26·27군 등 3개 군단급 부대를 산악지형을 이용해 은밀히 투입한 상태였다. 중국은 미국 지상군 중 최정예 사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포위해 섬멸시키려는 속셈을 갖고 9병단에 속한 3개 군단 예하 12개 사단 중에서 7개 사단을 포위 작전에 투입했다.

중공군 7개 사단으로 겹겹 포위

27일 밤부터 상황이 악화됐다. 중공군은 미 해병 제5연대가 포진한 유담리를 포위했고, 미 해병 제1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후방의 하갈우리 주변의 도로도 차단했다.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포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중공군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중공군의 포위망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실상 미 해병 제1사단은 황초령 고갯길 전후부터 장진호까지 좁고 험한 산길을 따라 작게 분산된 채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는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11월 30일에 이르러 철수를 결정했지만 일단 함흥으로 철수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장진호에서 함흥까지 철수가 가능한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도로 주변의 산들은 높았고, 계곡은 깊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곳곳에서 길을 가로막았다.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는 대부분 갈림길조차 없는 외길이었다. 당장 눈앞의 적을 뚫고 후퇴하더라도 고개마다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의 4중·5중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이 가능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영하 45도를 넘나드는 맹추위 속에 동상 환자는 속출했다. 전사한 시체는 순식간에 벽돌처럼 얼어붙었고, 중공군은 고개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철수해야 할 장진호 계곡은 얼음과 불의 지옥으로 변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중 투하로 임시교량 가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미 해병 제1사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악전고투를 치르며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12월 4일 천신만고 끝에 사단본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우선 하갈우리의 간이활주로를 이용해 12월 5일까지 4,312명의 부상자와 군수물자를 공중으로 후송했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항공기로 철수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그러나 당시 부대를 지휘한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고 단번에 거절했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철수한다면 2개 대대 병력이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마지막 항공기가 이륙한 후에도 남아야 하는데 그럴 순 없다는 뜻이었다.

대신 스미스 사단장은 110킬로미터나 떨어진 흥남 부두까지 사단 병력 전체가 걸어서 이동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후퇴인가?’라는 종군기자의 질문에 스미스는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험난한 산악지형과 영하 45도를 넘나드는 맹추위 속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적과 전투를 벌이며 부대 단위와 장비를 유지한 채 후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미 해병 제1사단은 이를 해냈다. 악전고투를 치르며 포위망을 뚫어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까지 이동했다. 이에 중공군은 제58사단, 제60사단의 일부 병력을 동원해 고토리-진흥리 지역과 황초령 일대를 차단하고, 제89사단이 진흥리 남쪽을 차단했다. 12월 8일 야간에는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급강하해 고토리 이남을 지키고 있던 중공군 대부분은 밤새 동사했으나 고토리 남쪽 6킬로미터 지점의 장진강 수문교를 파괴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다리가 파괴된 것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아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철수작전이 실패할 위기 앞에서 미 공군은 수송기 8대를 동원해 철교 자재 8세트를 공중 투하했다. 미 해병은 이 자재로 단 하루 만에 임시교량을 가설하고 병력과 장비를 고토리 이남으로 철수하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전차 40대, 1,400여 대의 차량, 1만4,000여 명의 병력이 임시교량으로 장진강을 건넌 것이다. 어떤 난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급변하는 전장의 상황에 맞춘 신속한 지원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임시교량 가설로 최대 위기를 극복한 미 해병 제1사단은 12월 11일에 전 부대가 미 육군 제3보병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함흥으로 이동해 함흥과 흥남 사이에 있는 집결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12월 14일에 사단 전 병력이 흥남부두에서 승선을 완료하고, 15일 아침 출항했다. 철수작전에 완벽히 성공한 것이다.

병력과 장비 유지한 완벽한 철수작전

역사적으로 장진호 전투는 전쟁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이었다. 철수작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군이 수행한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영국군과 연합군 총 33만8,226명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이 철수작전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는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영국군이 버리고 온 무기만 해도 8~1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 충분한 양이었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 해병 제1사단은 이른바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는 정신으로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장진호 전투는 추위라는 또 다른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전투였다. 사실 장진호 전투는 현대전 사상 가장 추웠던 동계전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스크바 전투나 독소전쟁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다 더 추웠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모스크바 전투는 영하 20~30도 정도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평균기온이 영하 5도, 최저기온은 영하 30도 정도였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는 평균기온이 영하 15도, 최저기온은 영하 45도였다. 숨만 쉬어도 폐가 얼어붙을 것 같은 살인적인 추위를 이겨낸 것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현대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대가 제대로 맞붙어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 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가 됐으나 제1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포위를 뚫어내고 후방 철수에 성공했다. 이것은 현대전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대가 제대로 맞붙어 싸운 최초의 전투에서 미군이 중공군의 기습 매복 공격을 격퇴하고 철수에 성공했다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장진호 전투로 흥남철수작전 가능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부대는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전투단, 영국군 코만도 부대, 소수의 한국 전투경찰 부대가 속해 있었다. 병력은 총 3만여 명이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손실은 전투손실 전사 463명, 후송 후의 사망자 98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이었고, 비전투손실은 3,659명으로 대부분이 동상에 의한 손실이었다.

중공군은 지상전투에서 전사 1만5,000~3만7,500명과 부상 7,500명, 항공폭격으로 전사 1만 명과 부상 5,000명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공군 역시 동상으로 막대한 비전투손실을 입었다. 제20군의 경우 90%가 동상환자였고, 제27군은 1만여 명의 비전투손실을 입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접촉하지 않은 부대도 강력한 공중폭격과 혹한에 시달렸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 9병단은 재편성을 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다음 해 3월이 되어서야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으며 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한미 양국은 매년 11월 하순 장진호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고 호국영웅의 희생과 노고를 기리고 있다.

박종상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 몰려든 피란민들이 수송선에 탑승하고 있다.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 몰려든 피란민들이 수송선에 탑승하고 있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약 10일간 193척의 군함이 동원돼 10만5,000명의 병력과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대한민국으로 이송한 작전이었다.

1950년 11월 말,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유엔군은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 제1사단을 시작으로 유엔군 전 병력을 해상을 통해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시켰다.

유엔군이 육로가 아니라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뤄지는 흥남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철수를 준비했다.

그런데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피란민들이 같이 내려가겠다고 구름떼같이 흥남 부두로 모여들었다. 미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란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데다 병력·장비·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피란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해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이 “피란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반발하고, 여기에 미 제10군단 사령관의 통역 현봉학 박사와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한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사령관인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알몬드 장군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란민을 태운다고 허락하면서 무려 10만여 명의 피란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특히 12월 23일 흥남항을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배에 실린 군수물자를 버리고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출항, 다음날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더 이상 피란민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시 거제도 장승포로 항로를 돌려 다음날인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닻을 내렸다.

3일의 항해 기간 동안 메러디스 빅토리호 안에서는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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