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달라진 초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우리 역사 속 영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 일생일문(최태성 / 생각정원)

우당 이회영 선생은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평생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우당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했던 자랑스런 선조들을 만나본다.

정유재란 당시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거침없이 밀려오는 왜군에 조선 수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죠. 옆에서 배가 가라앉고 동료들이 총과 활을 맞은 채 바다에 빠지자,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공포에 떨던 수군은 결국 목숨을 구하고자 피신하고, 그렇게 12척의 배가 뱃머리를 돌리고 맙니다.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전장으로 불러냅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병사와 식량, 무기는 어찌어찌 갖출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배였습니다. 바다에서 싸우려면 배가 필요한데. 이 배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도망친 12척의 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분개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분노보다 반가움이 앞섰습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배가 확보된 만큼 이제 부대를 꾸리게 되었는데, 이때 또다시 좌절 할 수 밖에 없는 명이 떨어집니다. 가망이 없으니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합류시키라는 어명이었죠, 이에 이순신은 결단을 내리고 그 유명한 장계를 올립니다.

“임진년부터 5~6년 동안 적이 호서와 호남을 감히 공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오히려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없앤다면 이것이야말로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며, 적들은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은 비록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의 결과는 우리 모두 아는 대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고작 12척에 1척을 더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의 영해로 쳐들어온 일본 수군을 막아내고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냅니다. 저는 이 대단한 승리의 초점을 이순신 장군이 아닌 12척의 배에 맞춰보고 싶습니다.

명량해전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무릅쓰고 일본군에게 돌격해 대승을 거둔 12척의 배. 이 배는 칠천량해전에서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치기 바빴던 바로 그 배들입니다.

칠천량해전에서는 겨우 12척밖에 남지 않아 도망친 그 배를 이순신은 오히려 12척씩이나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찾아내는 희망,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 결과는 실로 놀랍고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이순신이 좌절과 방황을 이겨낸 힘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늘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온 그였으니, 젊은 시절에 반복된 좌절과 그로 인한 방황 역시 자신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여기며 이겨냈던 것은 아닐까요? 젊은 이순신은 ‘이제야’ 무과 공부를 시작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자책하는 대신, ‘이제라도’ 적성에 맞는 무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북돋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조선도 몰랐던 조선(신봉승 / 청아출판사)

‘조선 왕조 오백년’ ‘한명회’ 등 사실에 입각한 역사극의 대가 신봉승 작가가 가을 들판 이삭줍기하는 심정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50편의 에세이에 담아냈다.

유럽문화의 융성과 강성함을 논하게 되면 반드시 거론되는 것이 15세기 유럽의 르네상스이다. 그 르네상스가 오늘의 유럽문화를 건재하게 하는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럽 문화의 재건으로 일컬어지는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먼저 고개를 들었고, 그 결과는 15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은 모두 피렌체에서 경험하고 연마한 예술투혼으로 르네상스 미술을 이끌었던 예술가들이다. 피렌체 건축문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두오모 성당이 완공된 것은 1436년이고, 체코의 프라하 광장에 세워진 천문시계가 완성된 해는 1438년이다.

바로 유럽의 르네상스가 꽃피는 이 시절이 조선왕조의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세종 18년 연간이다. 이때를 전후 한 세종시대의 업적을 살펴보면 유럽의 르네상스 운동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영실에 의해 건물 전체가 거대한 시계로 구성된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고, 또한 세계 최고의 철제 측우기가 발명·제작되었다. 그리고 6년 뒤에는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이 제정·반포되었다.

유럽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을 때 극동에 위치한 작은 나라 조선에서도 세종이라는 걸출한 임금이 주도하는 조선의 르네상스가 요원의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이 어디 문자의 창제뿐이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이 간행돼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였고, 모든 고유 악기를 정비하여 조선 음악의 틀을 완성하였으며, 친히 종묘대례악곡을 작곡하여 연주하게 하였다.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왜 우리에게는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평가되지 않는가. 우리의 학문이나 역사 연구가 국가의 정체성으로 이어지지 않아서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탁마(琢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

‘15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이 유럽문화를 번성하게 하였다면, 그때와 똑같은 15세기 조선에서도 성군 세종이 주도하는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 간단한 구절이 각급 교과서에 등재되어 초등학교의 어린이들이 노래처럼 부르고, 중·고등학교의 청소년들의 꿈과 정체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인문학이 무너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무너질 뿐이다. 인문학은 역사 인식과 함께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