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의거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안중근기념관. 
하얼빈 의거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안중근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플랫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플랫폼.
국가보훈부 주관 2023 국외 보훈사적지 탐방에 참여한 청년들이 첫 번째 탐방지인 여순관동지방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5박 6일간 이뤄진 올해 탐방에는 총 200여 명이 참여했다.
국가보훈부 주관 2023 국외 보훈사적지 탐방에 참여한 청년들이 첫 번째 탐방지인 여순관동지방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5박 6일간 이뤄진 올해 탐방에는 총 200여 명이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조국독립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평안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는 이 땅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나라사랑>은 제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간직한 중국의 보훈사적지를 현장 취재했다. 이번 기획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최전선기지였던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역사를 안중근 의사, 윤동주 시인, 간도와 일제의 만행을 집중 취재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그리고 여순에서의 최후

한여름에 들어선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이 서린 곳이다. 거사를 앞둔 안 의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 하다.

폭염과 소나기가 반복되는 가운데 하얼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다오리구 내 자오린공원서 만난 안중근 서비. 안중근 의사가 의거 계획을 점검했던 곳에 세워졌다.

서비 앞면에는 안 의사가 순국 이틀 전에 쓴 마지막 휘호로 추정되는 ‘청초당(靑草塘)’과 안 의사 특유의 손도장이, 뒷면에는 ‘연지(硯池)’가 선명했다. 손도장 음각에서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자오린공원 내 안중근 서비.
자오린공원 내 안중근 서비.

청초당은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라는 뜻으로,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도 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듯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하얼빈 의거를 준비하는 안 의사의 마음인 셈이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야욕에 물든 일제의 중심을 관통한 젊은이의 ‘용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의거 직후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안 의사는 1910년 2월 7~14일간 6차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3월 26일 순국했다.

안 의사가 의거를 단행했던 곳, 하얼빈역 바로 그 자리는 현재 안중근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하얼빈역 정문 왼쪽에 자리한 기념관에서 하얼빈역 1번 플랫폼으로 사용 중인 의거 장소를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유리창 너머 “코레아 우라”를 외치는 안 의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안 의사가 체포돼 재판을 받았던 곳인 라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여순관동지방법원은 일본의 대표적 식민통치 기관이다. 법원 건물은 현재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층 안쪽에는 안 의사 추모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 안 의사의 초상 앞에 하얀 국화를 헌화하며 그를 기릴 수 있었다. 방명록에 한글로 적힌 ‘감사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재판을 받은 안 의사가 수감됐던 여순감옥은 현재 여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안 의사가 사형됐던 위치에 동상과 함께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 중의 하나인 여순감옥구지묘지는 라오닝성 다롄시 외곽을 찾았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여순감옥 공동묘지로 사용됐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름 모를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계신 곳임에도 별도의 봉분 없이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는 모습이다. 함께 찾은 이들이 일제히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냈다.

민족정신 교육의 산실 명동촌,

윤동주와 송몽규 생가

지린성 허룽시 명동촌. ‘명동(明東)’이란 이름은 ‘동방, 곧 조선을 밝게 하자’는 뜻으로, 명동촌은 중국 북간도 지역 한인 민족교육운동의 중심지였다. 윤동주, 송몽규의 고민과 흔적을 찾아나섰다.

명동학교는 민족정신 교육·계승에 힘쓰며, 개교 이래 민족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와 송몽규 등 17년 동안 1,000여 명의 애국청년들을 배출했다.

윤동주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시와 삶을 바친 저항 시인이다. 윤동주는 1943년 7월 19일 체포돼, 1945년 2월 옥중에서 순국했다. 민족에 대한 자아적 반성과 참회 의식, 민족 의식 등을 다룬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기를 넘어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명동촌역사기념관으로 새롭게 복원된 명동학교. 윤동주, 송몽규 등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배출된 곳이다.
명동촌역사기념관으로 새롭게 복원된 명동학교. 윤동주, 송몽규 등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배출된 곳이다.
윤동주 생가.
윤동주 생가.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제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학문적 연구에 힘쓰다 1943년 7월 14일 일제에 체포돼, 1945년 3월 7일 옥중 순국했다.

명동학교의 원래 모습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소각됐으나 2011년 복원돼 현재는 명동역사기념관으로 변했다. 명동학교 복원 이후 윤동주·송몽규 생가, 명동교회 등 마을 전체를 새롭게 정비했다. 잘 정돈된 마을과는 달리 윤동주 생가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생가는 1995년 본채와 별채가 복원돼 현재에 이르며, 2007년 들어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됐다.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 전람관, 윤동주 기념비,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온 우물을 만났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다시 읊으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의 숨결이 현장을 찾은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 간도

봉오동 전투, 간도 일본 총영사관

우리가 간도로 부르는 두만강 북쪽 지역 일대는 현재의 옌볜(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는 곳이다.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일제 침략 이전에도 있었지만 1910년을 전후해 일제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 강행으로 농토를 탈취하면서부터 줄을 잇기 시작했고, 독립운동도 활발했다.

간도를 생각할 때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대승을 이뤘던 봉오동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퇴해 압도적인 전승을 거뒀다. 봉오동 전투의 대승은 당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시켰고, 우리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찾아가려 한 봉오동 전투 기념비는 지린성 옌볜(연변)조선족자치주 투먼시에 있는데 상수원과 가까워 접근이 어려웠다. 먼발치에서나마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일대를 눈으로 훑자, 가파른 경사의 산 속을 뛰어다니며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던 선열들의 모습이 선연히 비춰지는 듯 했다.

간도 지역의 항일투쟁이 활발했던 만큼 일제의 탄압도 극렬했다. 간도에 대한 일제의 야욕은 일본 총영사관으로 상징된다. 긴 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한 옛 간도 일본 총영사관은 현재 중국 지린성 룽징시 인민 정부 건물로 활용되고 있어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속건물격인 옛 총영사관의 감옥은 현재 ‘간도 일본 총영사관 죄증 전람’이라는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감옥을 비롯해 담장과 관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삼엄했던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고발하다

731부대와 오봉촌

731부대기념관 전경.
731부대기념관 전경.
731부대기념관 내부.
731부대기념관 내부.

중국에는 엄밀히 말해 보훈사적지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이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역사의 흔적은 간직한 곳들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 약칭 ‘731부대’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중일전쟁 동안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생물·화학무기 개발과 생체 실험을 행했다.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 그리고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 등이 부대 실험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731부대 대부분의 시설과 수많은 자료들이 소실됐지만 부대가 있던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731부대 자리에는 기념관이 크게 들어서 있고, 시체를 소각하던 소각장 굴뚝과 가스실, 선로 등도 일부 남겨져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생을 마감했을까 생각하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말없이 들어선 전시관에는 당시 부대의 건물 사진부터 실험도구와 보고서 등 일제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전시관과 유적을 둘러보며 생체실험으로 인해 선열들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며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먹먹해 왔다.

오봉촌일본군병원기념관 내부.
오봉촌일본군병원기념관 내부.

일제의 수탈을 증언하는 또 다른 현장은 바로 오봉촌이다. 지린성 옌볜(연변)조선족자치주 안투현 오봉촌은 청나라 때부터 이름난 석금 생산지로, 1931년 이후 일본의 수탈지로 변모했다.

당시 오봉촌 주민을 비롯해 강제로 노역에 투입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금광으로 내몰려 열악한 환경 속에 고된 노동으로 목숨을 잃었다.

현재의 오봉촌은 잘 정비된 농촌의 모습이나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오봉촌일본군병원기념관은 지난 수탈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일제가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망루의 흔적이 남아 일제의 총구 앞에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했다.

여러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주일 여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보다 생생하게 가슴에 남는 듯 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향에서 대한독립을 꿈꾸던 선열들의 외침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까지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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