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한 6·25전쟁. 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으나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반전시켜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유엔군은 재반전에 성공했고 이후 휴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룻밤에도 수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고지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여러 고지전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약 10일에 걸쳐 강원도 철원 북방 395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싸워 격퇴한 전투이다.

약 10일간의 전투에서 12차례의 공방전을 반복하는 동안, 고지의 주인은 7차례나 바뀌었다. 철원 서북쪽, 이름조차 없었던 395고지는 그 이후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동전에서 고지전으로 바뀐 전쟁

철원평야에 우뚝 솟은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 서북 12킬로미터 지점, 고암산과 효성산이 교차해 흐르는 능선의 끝에 있는 야산이다. 당시 철원과 평강, 김화는 ‘철의 삼각지’로 불리고 있었다. 철의 삼각지대는 남북으로 연결하는 3번 국도와 5번 국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있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1951년 7월 휴전회담 이후 벌어진 고지 쟁탈전의 중요 전투는 주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그중 철원의 백마고지는 서남쪽의 철원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마고지를 점령한 쪽이 한반도 중부지역의 유일한 곡창지대인 철원평야를 차지하게 돼 아군으로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1952년 10월은 휴전회담과 고지 쟁탈전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6·25전쟁이 개시된 이후 남과 북을 오르내리던 1년이 지나고, 전쟁의 양상은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진 설전과 함께 각자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한 전선의 고지 쟁탈전으로 바뀌었다.

백마고지 전투의 주인공인 국군 제9사단은 1951년 10월 미 제3사단과 교대해 395고지 일대에 배치됐다. 그해 11월 초에는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일련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52년 여름까지 사단 자체의 교육훈련, 특히 포병 화력지원과 화기의 실사격 훈련을 계속 실시했다. 이 때의 집중적인 훈련이 백마고지 전투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당시 철원과 김화 지구 중서부 전선은 미 제9군단의 담당지역으로 국군 제9사단·제7사단, 미 제2사단이 전방에 있었고 미 제40사단이 예비로 배치돼 있었다. 여름까지는 별다른 접전 없이 소강상태가 유지됐으나 가을이 되자 전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및 삼각고지 전투,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 등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전장의 화약고가 됐다.

9사단 장병 전시훈련에 심혈 기울여

1952년 10월이 되자 모든 전선에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세 징후가 나타났다. 그 와중에 중공군 군관이 귀순해 중공군이 10월 4일부터 6일까지 195고지를 공격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 정보에 따라 미 제5공군의 전폭기가 적 후방을 폭격했고, 적 역시 10월 3일부터 포격을 강화했다.

드디어 10월 6일 오전 중공군은 북쪽 5킬로미터에 위치한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됐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저녁 무렵 38군 산하의 3개 사단을 동원해 395고지를 비롯한 국군의 방어선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폭이 2킬로미터 밖에 안되고 길이가 3킬로미터 남짓한 독립고지인 백마고지에 무려 9개 연대가 서로 얼키며 설키는 대접전이 시작됐다.

개전 첫날 국군 제30연대는 이날 밤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며 고지를 지켰다. 중공군 제340연대는 10월 7일 새벽에 다시 제3차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은 미 공군의 전술폭격과 지원 포병의 포격을 요청했고, 제28·30연대는 격전 끝에 395고지와 화랑고지를 지켰으나 정면의 무명고지의 적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고 중공군은 화랑고지에 이어 395고지를 점령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국군은 395고지를 탈환했다. 다시 10월 8일 새벽부터 중공군이 공세를 재개한 이래 10월 12일까지 총 12차례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그동안 국군 제9사단은 예하 3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며 중공군 제38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중 4·5·6·9·10차 등 다섯 차례의 전투는 최소 12시간에서 24시간이 넘게 지속되기도 했다.

백마고지 3군신의 위대한 무훈

이 전투에서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 등이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적의 특화점을 타개하기 위해 수류탄 다발을 안고 육탄 돌입해 파괴함으로써 국군의 백마고지 탈환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빛나는 무훈을 남기고 산화한 이들은 오늘날까지 백마고지 3군신으로 불리고 있다.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 쟁탈전은 아군의 투지와 압도적인 화력에 중공군이 밀리면서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제12차 공방전으로 끝을 맺었다. 이날 중공군 제38군은 예하 사단을 전선에서 철수시켰고,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의 승리로 귀결됐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사단장 김종오 소장을 비롯한 지휘관의 적절한 지휘와 장병들의 노력과 성공적인 전시 훈련의 결과였다. 특히 제9사단은 8개 포병대대, 3개 포병포대, 2개 중박격포 중대, 각종 항공자산을 적절히 통합 운용했고, 미군과의 원만한 연합작전을 통해 효과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제9사단은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제3군단 소속으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부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장병들은 패배의 오욕을 씻어내기 위해 일치단결했고, 이 모든 노력으로 결국 빛나는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치열했던 전투’라는 표현만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실상을 보면 그 ‘치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양측이 사용한 포탄은 중공군 약 5만5,000여 발, 국군 및 유엔군 약 22만여 발에 달했다. 유엔공군은 무려 754회나 출격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8,234명을 사살했고, 57명의 포로를 획득했으며 노획품도 3.5인치 로켓포 22문, 기관총 약 60정에 달했다. 반면 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전사자 505명, 부상자 2,526명에 실종자가 391명에 달했다.

많은 피해를 남겼으나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전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국군이 철원 서남부 지역에서 전술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이로써 유엔군은 휴전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보다 더욱 값진 것은 바로 국군의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국군의 전력 증강이었다.

국군 전력 증강으로 이어진 승리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국군의 전력 증강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미국의 군사정책 결정자들은 1951년 초, 현리전투와 같이 다수의 전투에서 패배한 국군의 모습을 보고, 한국군의 재편성 및 증강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이 중공군을 제압하는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아 국군의 전략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군에 대한 선입견이 바뀌면서 1952년 5월부터 미군이 주도하고 있던 국군 증강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고, 이는 향후 안정적 전력 보강과 승전의 단단한 기반이 됐다.

김상규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돌아와야 할 유해 발굴’ 계속 이어진다

백마고지에서 발굴된 고 편귀만 하사 유품.
백마고지에서 발굴된 고 편귀만 하사 유품.

백마고지는 6·25전쟁 당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으로 국군 9사단이 백마고지에서 열흘간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약 96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실종자 가운데 아직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전사자도 적지 않다.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은 비무장지대(DMZ) 일대에만 아직 발굴되지 못한 국군 전사자 유해가 1만여 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2022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백마고지, 화살머리 고지 등에서 유해를 발굴했고, 신원이 감식된 분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중 고 편귀만 하사의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편 하사의 유해는 백마고지 유해 발굴을 위해 조성한 주차장 옆 경사면에서 작은 뼛조각을 찾아낸 것이 계기가 돼 발굴됐다. 보통 유해 발굴이 끝난 곳에 주차장을 만들기에 새로운 유해의 발굴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

발굴된 유해 옆에는 고인이 생전에 쓰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발견할 수 있었고, 유가족들이 2006년부터 4차례에 걸쳐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둔 덕에 신속하게 가족관계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발굴된 유해는 1만1,313기에 이르나 고 편귀만 하사의 사례와는 달리 신원이 확인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유해의 신원확인을 위해서는 유가족들의 유전자 시료 채취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전적비·위령탑 등 생생한 안보교육 현장

백마고지 전투는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되었을 정도로 6·25전쟁 당시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현재 백마고지는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서 1990년 백마고지가 보이는 곳에 백마고지 위령탑과 함께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이 건립됐다. 이에 앞서 1985년에는 전투에서 희생된 국군과 중공군 1만7,535명의 영혼을 진혼하는 위령비가 건립됐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길에 위치한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기념관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다리를 들고 힘차게 뛰어나가는 백마 동상이 서 있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수 십 개의 태극기와 함께 625그루의 자작나무로 조성된 가로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위령비에 이어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기념관은 길을 사이에 두고 동편과 서편 양쪽으로 나눠져 있는데 백마고지 전투와 관련된 유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9사단을 지휘한 김종오 장군의 사진과 유품, 백마고지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백마 3군신의 부조상 등이 있다.

기념관을 지나면 백마고지 전적비와 하늘 높이 솟은 백마고지 위령탑이 서 있다. 위령탑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철원평야와 함께 백마고지를 조망할 수 있는 백마고지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백마고지는 본래 395고지였으나 10일간의 전투에서 양측이 27만여 발의 포탄을 쏘면서 고지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바뀌었다고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됐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서 백마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나 백마고지 너머로 북한 지역까지 함께 볼 수 있어 생생한 안보교육이 현장이 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비와 위령탑. 가장 치열했던 고지전으로 손꼽히는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향후 국군 전력 증강의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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