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만큼 그리운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을까? 예순을 바라보는 내게도 소중히 간직해온 추억 속의 소풍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정식 중학교가 아닌 ‘새마을 청소년 학교’란 곳에서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나중에 검정고시를 봐야 했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당시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분이었는데 우리를 친동생 대하듯 세심하게 챙겨주셨다.

매주 토요일마다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소풍같은 등산을 하셨다.

선생님이 우리를 데리고 오른 산은 계룡산이었다. 체력이 약한 친구가 숨을 헐떡일 때면 선생님은 그 친구를 등에 업고 산길을 오르셨다. 산행길에 이름 모를 꽃과 나무를 발견할 때면 선생님은 눈빛을 반짝이며 일일이 가르쳐주셨다. 식물의 이름과 특성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우리 눈에는 선생님이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로만 보였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로 목을 축이며 산 중턱에 이르면 모두 잔디밭에 둥글게 둘러앉아 수건돌리기를 했다. 그때 자주 불렀던 노래가 바로 연가(戀歌)였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술래가 되면 벌칙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막춤이라도 춰야 했기 때문에 모두가 기를 쓰고 게임에 집중했다. 한바탕 오락이 끝나면 선생님은 배낭을 열어 준비해온 ‘보름달 빵’과 ‘환타’를 꺼내 놓으셨다. 매주 토요일 등산을 행복한 소풍으로 기억하는 이유도 그때 맛보던 빵과 음료수 때문이다. 가난한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배낭은 보물상자였다.

산 중턱에서 먹은 간식이 다 소화될 무렵 정상에 도착하면 선생님은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 주셨는데 그 맛이 환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라면을 더 먹으려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국물까지 싹싹 비우는 모습을 선생님은 흐뭇하게 지켜보셨다.

말도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내가 기특했던지 선생님은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정식 학교로 전학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몇 십년 지난 일이지만, 가르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지면 다시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울하고 배고프던 그 시절을 즐거운 소풍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도 그분처럼 아이들에게 밝은 햇볕과 맑은 바람, 삶의 희망을 일깨워준 선생님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조원표 2016년 한국예총 <예술세계>에서 수필 부문으로 등단했다. 나라사랑교육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