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생사를 오가는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에서는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 있다. 정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간을 증언하는 노병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참전유공자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년 헌정회 고문이 기고를 보내왔다.

전쟁에서 ‘소위 중위는 장교 소모품이요. 일등병, 이등병은 병사 소모품’이라는 말은 하급 계급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나는 6·25전쟁 3년 2개월간 ‘소모품 장교’로 최전방 소대장, 중대장, 대대 작전장교, 사단 작전 과장으로 싸웠다. 혈맹 미군과 함께 인민군,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며 총상도 당하고 악전고투,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으나 끝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내가 치른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2개의 전투가 있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서부전선 소사지구 전투

6·25 발생 이틀째인 1950년 6월 26일, 보병 22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장이었던 나는 소대원 36명과 함께 대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투입됐다. 우리 부대가 배치 받은 곳은 서부전선 소사 지구의 한 무명 능선이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중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서울로 침입하려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통신마저 두절된 칠흑 같은 밤, 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 소대 좌우에서 같이 방어 진지를 치고 있었던 소대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좌우 진지를 점령한 적은 우리 소대를 포위한 채, 날이 밝기만 기다리면서 포위망을 압축해오고 있었다.

밤샘 전투 끝에 우리 소대는 병력의 4분의 3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됐다. 생존자는 단 9명. 전의를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적은 우리 동태를 완전히 감지할 수 있는 높은 언덕을 선점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아군 9명은 퇴로도 없는 구덩이에 몰려 진퇴양난의 암담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나는 가망 없는 저항을 하다가 몰살당하기보다는 야간 탈출이라도 해서 다시 국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부하들과 함께 일단 백기를 들었다.

적은 전황이 불리해지면 우리를 몰살시키려고 9명 모두를 구덩이에 가둬두고 감시했다. 구덩이에 갇혀 고개도 못 든 채 종일 엎드려 기회만 엿보는 중 드디어 기회가 왔다. 6월 27일 새벽 2시경 우리를 감시하던 적 경계병들이 정신없이 코를 골면서 졸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나와 소대원 8명은 소음을 줄이려 군화를 벗고 맨발로 구덩이를 빠져나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날 밤 수원 육군본부 장병 임시집결소에 도착한 우리는 22연대장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나의 첫 번째 전투였다.

대담한 작전으로 중공군을 격멸한 서부전선 노리고지 전투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지던 1952년, 당시 나는 최전방에 있는 연천의 1사단 15연대 3대대에서 작전장교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사단장 박임항 소장과 미 고문관 윌리엄 대령이 우리 부대 관측소(OP)로 시찰을 나와 영어로 브리핑을 했더니 그 직후 사단 작전 과장을 맡으라는 인사명령이 내려왔다. 상급 부대인 미 제1군단과의 긴밀한 작전협조를 위한 조치였다.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는 휴전설이 제기되면서, 155마일 전선에서는 전략적 요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때였다. 당시 우리 1사단의 작전지역인 임진강변의 노리고지는 최전방의 전략적 요지로 아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군과 중공군은 뺏고 빼앗기기를 10여 차례나 반복하면서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묘안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의 특징을 이용해 적의 주력부대를 섬멸시키는 기만작전을 세웠다.

적이 노리고지를 공격해 올 때, 아군부대를 임시로 후퇴시켜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후, 적이 대병력을 노리고지에 투입하면 아군이 미리 준비한 화력을 노리고지에 집중해 적을 격멸하는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아군 1사단 포병, 미 1군단의 포병과 전차부대, 미 5공군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다.

국군 1사단장과 미 1군단장의 승인을 받아 작전을 감행한 결과, 우리의 예상이 100퍼센트 적중됐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움직인 중공군은 아군의 집중포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고지로 돌격한 아군은 진지를 재점령하는 한편 적의 무기 수 백정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우리는 노리고지를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작전의 성공으로 포격 후 돌격을 감행한 소대장은 1계급 특진과 훈장을 받았고, 작전 과장인 나는 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조국을 위해 모험과 용기, 그리고 충성심 하나로 목숨을 바쳐 값진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사선을 함께 넘나들었던 전우들이 생각난다. 조국을 침략한 적에게 한 뼘의 땅도 빼앗길 수 없다며 총탄이 빗발치는 고지로 뛰어들었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다. 또한 이역만리 먼 땅에서 달려와 피를 흘리며 함께 싸운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어느새 정전 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6·25가 벌어질 당시만 해도 우리는 적을 물리칠 탱크도 한 대 없었지만 이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10대 교역국에 올라섰다. 그러나 아직 평화의 길은 멀고, 통일의 과제는 요원하다.

조국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렸던 영웅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력으로 다시는 이 땅에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평화의 기운만이 넘쳐나기를 노병은 간절히 소망한다.

김상년 국가유공자, 8·9·10대 국회의원, 헌정회 고문, 전 국회 내무위원장

1952년 12월 필자(가운데)가 노리고지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들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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