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애틋하고 아련하다. 정년퇴임 후 소일거리 없이 무료하게 지내시는 것이 안타까워 무언가 작은 즐거움이라도 드리고 싶어서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화투다. 다행히도 아파트 아래위층으로 살았기에 자주 찾아뵙고 소통할 수 있어 참 좋았다.

고(Go)를 할까 스톱(Stop)을 할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주로 사위인 내가 이기는 날이 많았는데 일부러 잃어 드리려고 노력은 하지만 게임에 임하면 승부욕이 발생해서인지 좀처럼 그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화투가 끝나고 집 주변 식당에서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정이 두텁게 쌓여가는 것 같아 행복했다.

그런데 장인어른께 치매가 왔다는 것을 화투를 치며 알게 되었다. 자꾸 내가 속인다며 억지를 부리고 짜증이 심해졌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얼른 병원을 방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늦게나마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아내가 “아빠 너무 드시는 것 아냐?”라며 큰 걱정을 했다. 장모님은 “하루 종일 병원에 있는 양반이 먹는 재미까지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사냐”며 그냥 드시도록 내버려 두란다. 아내에게는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지만 내게는 절대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법이 없다. 건강이 온전하고 공직 생활을 할 때는 편지 한 장도 가위로 잘라 버릴 만큼 철두철미하고 치밀했던 분이셨다.

아들까지 동반하고 갔더니 손주의 방문이 반가우셨는지 입가에 웃음꽃이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자주 아이들과 동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장인어른은 몇 해 전 저 먼 하늘나라로 이별여행을 떠났다. 임종 직전 내 손을 잡고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내에게는 거수경례까지 하셨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자 할 때 거수경례를 한다는데 가정을 잘 건사한 믿음직한 딸에 대한 마지막 신뢰와 고마움의 표현을 하신 것 같다. 입관식을 지켜보면서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소홀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명을 소중히 하는 장례지도사의 손길 하나하나에 안심이 된다. 면도도 해드리고 꽃무늬가 있는 관에 세심하게 눕혀드리며 예의를 표하는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엊그제 장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추모원에 다녀왔다. 장인어른 사진을 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는 게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든지 또 찾아와’라고.

조원표 2016년 한국예총 ‘예술세계’에서 수필 부문으로 등단했다. 나라사랑교육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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