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바다는 장엄했다. 천지에 가득 찬 눈부신 노을, 환하게 불을 머금고 일렁이는 바다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그 해가 반쪽만 남았다가 나중에는 여인의 실눈썹이 되고 그마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니 온 누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알지 못할 정적이 무겁게 깔리는 것이었다.

삐익! 하며 일몰의 하늘에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작은 새들은 몇 개의 까만 점이 되어 어둔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막막한 허공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티끌 같은 나의 실존적 의미는 무얼까 곰곰 생각해 본다.

“서쪽 하늘이 취객의 볼때기처럼 붉다./불콰한 색깔이 아주 볼만하다./소주 몇 잔에 혼자 취해버린 걸까?/아니면 나도 함께 취한 것일까?/취한 값 하느라고 너울너울 춤을 춘다./술 취한 저녁놀이다”

덜 익은 나의 습작시 ‘저녁놀’이다. 어느 낯선 시골마을의 황혼 빛긴 하늘, 농부가 소를 앞세우고 강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던 그 몽환 같은 정경이 잊히지 않는다.

저녁놀이 그토록 눈부신 건 가슴 속에 멍울처럼 남아 있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오늘이란 시간의 파편이 역사의 지평 저 너머로 사라져가는 순간, 그럴 때는 황혼의 트럼펫이 가슴 저린 울림으로 아스라이 먼 하늘가로 퍼져 나간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은 아름답다. 종말의 순간은 온 힘을 다해 남은 생명을 발산하기에 그처럼 처절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영화도 라스트 신이 작품전체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문학작품도 종장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처럼.

무엇이건 종말이 아름다워야 한다. 시작보다 끝마무리를 잘해야 보람을 거둘 수 있다. 바둑도 고수는 끝내기를 잘하는데 하수는 계속 잘 하다가 끝마무리에 실패해서 대마(大馬)를 잃고 땅을 치며 억울해 한다.

독일속담 “Ende gut alles gut”도 끝이 좋아야 전체가 다 좋다는 의미다.

일몰이 찬란하듯이 인생의 피날레도 그럴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누구나 종말은 예고된 것일 테지만 그저 사라져감의 허무보다는 불타오르며 사라져가는, 사라짐의 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처럼 너와 나의 삶도 일몰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하고 말이다.

하기야 해 뜨고 해지고, 바람 불고 비 오는 세상사가 모두 한바탕 코미디가 아닐까.

울다가는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생사도 한바탕 연극이다. 어차피 한바탕 연극 같은 인생, 뒤에 남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이별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기를 바랄 수는 없어도 뒷맛이 상큼한 한편의 연극을 구경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배철웅 4·19혁명유공자로 현재 4·19혁명공로자회 이사를 맡고 있다. 국제신문 논설위원을 11년간 역임하고, 동명대 신문방송학과 초빙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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