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세스패트리샤경보병연대’가 1951년 4월 중공군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 가평고지로 향하고 있다.

북한의 기습남침에 의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회원국들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서 달려왔다. 이른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6개의 대륙에서 빠짐없이 참가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자국의 젊은이들을 소집하여 국제평화와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기꺼이 참전했다.

남북아메리카에서도 캐나다와 콜롬비아가 어김없이 참전했다. 캐나다는 영연방 국가의 일원이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맹방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캐나다는 미국과 함께 북아메리카의 대표주자로 참전했다. 콜롬비아도 남아메리카의 유일한 참전국이자 16개 유엔회원국 전투부대 파병국가 중 맨 마지막으로 참전했다.

 

캐나다, 미·호주 이어 육해공군 파병

캐나다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했다. 미국과 호주에 이은 세 번째의 육·해·공군 파병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캐나다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유엔이 한국지원에 대한 결의를 하게 되자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라우렌트(Louis St. Laurent) 수상은 1950년 6월 30일 의회 연설을 통해 “캐나다가 유엔의 지원결의를 이행하는데 참여하는 것은 유엔회원국의 일원으로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집단안보 활동의 일부를 캐나다가 담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파병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캐나다는 자국의 국방환경을 고려하여 먼저 해군을 파병했고, 이어 공군과 지상군을 파병했다. 캐나다는 1950년 7월 4일 유럽을 순방중인 해군 구축함 3척을 먼저 한국해역으로 파견했다. 캐나다 해군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경유, 오랜 항해 끝에 7월 30일 한국해역에 도착한 후 미 극동해군에 배속되어 해상작전 활동에 들어갔다. 캐나다 해군은 전쟁 기간 내내 3척의 구축함을 유지한 채, 동서해안을 넘나들며 해안초계, 항공모함 엄호, 열차파괴 작전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유엔군의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캐나다는 1950년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의 추가지원 요청을 받고 항공기수송대대 파병을 결정했다. 해군에 이은 공군의 파병이었다. 캐나다 공군은 7월 21일 제426항공수송대대를 파견해 미국과 일본 사이를 왕래하면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공중수송작전에 투입됐다. 캐나다 공군은 이들 항공수송작전 외에도 전투기 조종사 22명을 선발해 미 공군에 파견했다. 캐나다 공군은 전쟁 기간 중 6대의 수송기와 12명의 조종사로 월 3,000시간 이상을 비행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다. 그 결과 1만 3,000여 명의 병력과 7백만 파운드의 물자를 수송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캐나다 정부는 1950년 7월 20일 미국으로부터 1개 여단 규모의 지상군 파병을 요청받았다. 당시 캐나다 군은 편제상 3개 보병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1개 연대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캐나다 정부는 8월 7일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육군파병을 결정하고 지원병 모집에 나섰다. 그 결과 11월 21일 캐나다 제25여단을 창설해 본격적인 파병준비에 들어갔다.

그 무렵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이은 38도선 돌파 및 북진작전으로 전쟁이 곧 종결될 것으로 예상하고, 미국은 캐나다의 참전을 다시 검토하게 됐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유엔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캐나다는 11월 25일 1차로 제2대대의 참전을 결정했다. 제2대대는 25일 미국 시애틀을 출발해 23일 간의 긴 항해 끝에 1950년 12월 18일, 부산에 도착했다.

한국전선에 도착한 캐나다 부대는 1951년 2월 19일, 여주 주암리로 이동해 영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투입됐다. 이후 캐나다 여단의 주력이 한국에 도착했다.

캐나다군이 한국에서 수행한 주요 전투는 1951년에 실시된 킬러작전을 비롯하여 가평전투, 자일전투, 코만도작전, 고왕산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캐나다 군은 주로 서부전선의 임진강과 역곡천 일대에서 싸우며 그 용맹을 떨쳤다.

콜롬비아, 마지막 전투부대 용맹 과시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의 유일한 참전국으로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한국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선뜻 나서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콜롬비아가 파병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정부, 의회, 국민들의 유엔안보리 결의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미국의 협조가 크게 작용했다.

콜롬비아는 19세기 초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래 줄곧 가톨릭 교리를 신봉하면서 세계평화와 자유를 부르짖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엔의 창설회원국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어떤 나라보다 유엔헌장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했다. 콜롬비아가 한국에 군대를 파병한 데에는 그런 종교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넓게 깔려 있었다.

1950년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은 콜롬비아는 먼저 해군 프리깃함 1척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9월 18일에 유엔과 미국에 이를 통보했다. 곧이어 육군부대 파병도 검토했다. 하지만 지상군 파병에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시일을 끌다가 파병부대의 수송, 훈련, 무기, 식량 등 일체를 미국이 부담한다는 약속을 받고 육군을 파병하게 됐다.

콜롬비아의 파병은 1951년 중순에 이루어졌다. 1951년 4월 중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전쟁이 다시 가열되자 해군의 프리깃함 파딜라호가 콜롬비아를 출발해 1951년 5월 8일, 일본 사세보 항에 도착했다. 콜롬비아 해군은 미 극동해군에 배속됐으나, 3일 후 영국함대가 주축이 된 서해안 봉쇄전대로 다시 배속돼 서해상에서 해상초계작전에 들어갔다. 이후 콜롬비아 해군은 주로 동해상에서 활동하며 적 해안포대 포격, 소해함 엄호작전, 수송선단 호위작전을 수행했다. 콜롬비아 해군은 전쟁 기간 내내 프리깃함 1척을 유지하며 소형함정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유엔군의 해상작전에 기여했다.

콜롬비아는 해군에 이어 곧 육군도 파병했다. 1,080명으로 편성된 콜롬비아 보병대대는 1951년 5월 21일 미 수송선을 타고 출발, 25일간의 긴 항해 끝에 6월 15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콜롬비아 대대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 양국의 고위 장성 그리고 부산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국 전선에서 콜롬비아 대대는 미 제24사단 제21연대에 배속돼 1951년 8월 6일부터 전투에 투입됐다. 이때 콜롬비아 대대는 화천 북쪽의 흑운토령전투를 시작으로 금성 진격전 등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1952년 5월 중순에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로 배속돼 김화 북쪽에 위치한 전초진지(400고지) 전투를 치렀다. 그때 콜롬비아 대대는 400고지를 점령한 후 그곳에 자국의 국기를 꽂으며 승리를 만끽했다.

또 1953년 3월에는 불모고지전투에서 고지를 빼앗기는 아픔도 맛보았다. 유엔 참전국 중 마지막으로 전투부대를 파병한 콜롬비아 군은 마치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 어느 참전국 못지않게 고귀한 피와 땀과 눈물을 아낌없이 바쳤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듯 캐나다와 콜롬비아의 용맹스런 전사들은 한반도의 지상·해상·공중에서 국제평화와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치 자신의 국가를 수호하듯이. 그런 캐나다와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의 감투정신과 희생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이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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