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 사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통과 소통의 수단들은 갈수록 빨라지고 많아지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이 관계의 단절이 불러온 고통 속에서 스스로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다. 초연결 세상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이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더 따뜻한 세상과 좋은 이웃을 만날 수 있을까?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21세기 다윈의 계승자’인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며 최후의 생존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자’였다고 말한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공저 / 디플롯)

△ 협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핵심이다. 우리의 진화적 적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적자’라는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 논리를 야생에 대입하면, 덩치가 클수록 더 싸우려 들며 그럴수록 덤비려는 자가 적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최상의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고 가장 매력 있는 짝을 얻을 것이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잘못된 ‘적자’의 해석이 사회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의 바탕이 되어왔으며, 정부 무용론의 근거로, 타 인구 집단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근거로, 또 그런 평가가 야기하는 결과의 참혹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중략) 대중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적자생존’ 개념은 최악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한 연구는 가장 덩치 크고 가장 힘세고 가장 비열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비축된 에너지를 고갈시켜 면역체계를 약화하고 결국 우리는 더 적은 수의 후손을 남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공격성이 높을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데, 싸워서 다치거나 잘못되면 죽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적자’는 우두머리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다정함은 일련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협력, 또는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행동으로 대략 정의할 수 있는데, 다정함이 자연에 그렇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속성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다정함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단순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협력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등의 복합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사람 아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습득한다. 우리가 타인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이 능력 덕택이다. 이 능력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통하는 관문, 수 세대를 걸쳐 쌓여온 지식을 잇는 문화적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 능력에서 시작된다. 많은 위력적인 현상이 그러하듯이 이 능력도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작이 아기가 부모 손짓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 불편한 편의점

2022년 공공도서관 대출 1위. 전 서점 종합베스트 1위, 2021년 4월에 출간돼 전 연령층의 폭넓은 공감을 얻으며 소설 읽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호연 / 나무옆의자)

△ 염 여사는 교사 연금으로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하고 살 수 있었다. 편의점을 차린 건 남편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편의점을 세 개 운영하는 남동생의 조언을 받아들여서였다. 남동생은 편의점으로 돈을 벌려면 매장이 최소 세 개는 되어야 한다면서 계속 확장해 나갈 것을 강조했지만, 염 여사는 이곳 하나만 운영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은 연금으로 살고 이 매장으로 편의점 식구들 생계가 해결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처음부터 그럴 줄은 몰랐지만 이제 오 여사와 성필 씨는 이 편의점이 아니면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고, 시현 역시 공무원 시험 준비에 드는 돈을 여기서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생 사장이나 자영업과는 거리가 멀었던 염 여사가 편의점 경영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이 사장인 자기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삶이 걸린 문제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였다.

△ 사장님이야말로 자신이 믿는 신을 닮은 사람인가 보다. 어떻게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살펴주는 걸까? 이 세계에서 신성을 얻은 자는 의느님이 아니다. 사장님같이 남에 대한 헤아림이 있는 사람이 그러한 자일 것이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는 발을 못 떼고 있었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자석이 뒤에서 당기는지 좀처럼 나서질 못했다. 사장님이 내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양 그녀 옆에서 전전긍긍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가보게. 나 오래 서 있으니 힘들어.”

나는 몸을 돌려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날 두고 사라진 엄마인가? 날 돌봐주시다 돌아가신 친할머니인가? 누구인가? 나는 그녀를 안고 나직이 말했다.

“죽어야 될 놈을…… 살려…… 주셨어요. 부끄럽지만…… 살아 보겠습니다.”

대답 대신 그녀는 마주 안은 작은 손으로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개표구를 지나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쉼 없이 발을 놀려 플랫폼에 다다랐다. 기차에 올라 지정 좌석에 앉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서 출발하길 바랐다. 눈물이 날아가버릴 정도로 빠르게 달려 단숨에 대구에 날 떨궈주길 바랐다. 내 열망을 아는지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편의점가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푸른 언덕이라는 청파동과 그곳에 자리잡은 불편하기 그지없다는 편의점도 보이는 것 같았다.

기차가 한강철교에 올랐다. 오전 햇살이 물의 표면에 반사되어 생동감 넘치게 빛나고 있었다.

노숙자로 자리 잡은 뒤론 서울역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딱 한 번 한강에 간 적이 있었다. 다리에 올라 몸을 던지려 했다. 실패했다. 사실 올겨울을 편의점에서 보내고 나면 마포대교 혹은 원효대교에서 뛰어내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