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이 역사의 굵직한 족적으로 탄생한 지 어느덧 회갑을 넘어섰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영원한 집권을 위하여 3·15부정선거를 획책했던 자유당은 국민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쳐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백기 투항해야 했습니다.

저항의 불길은 학생들의 궐기였으며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학생 시위가 없었던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정권은 신구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두 당으로 갈라섰으며, 국무총리로 뽑힌 장면은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며 혁명 후의 혼란을 방치했습니다. 이때 호시탐탐 정권의 약화를 노리고 있던 박정희 중심의 군부가 궐기하여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장면 정권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총 번 쏴보지 못하고 정권을 헌납했습니다.

4·19는 혁명에서 의거로 전락했으며 30여 년의 군사 정권을 지나 겨우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4·19세대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한 세대로 추앙되었으나 정권을 잡아보지 못한 유일한 혁명 세대입니다. 그러나 혁명 세대는 선배와 후배들에게 가장 친근한 중간세대로 그 영향력을 키워왔습니다.

이번에 혁명 공로자에 대한 추가 포상 신청을 새로 접수하면서 그동안 보류되었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민주의 새로운 여명이 활짝 펴질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100만 학도가 궐기했던 4·19혁명의 공로자가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입니다. 민주혁명의 고귀한 대열에 참여했던 모든 동지들을 포용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동지들에게 포상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역사의 순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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