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오랜 기간 문화와 가치를 만들며 동행해 왔다. 때로 요동치는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그 존재를 알렸던 종교. 이제 종교는 어느덧 각각 다양한 유산을 남기며 우리의 과거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찬 바람 부는 겨울, 인간의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건네는 종교건축물을 만나러 떠난다.

화성 남양성모성지

화성시 외곽의 성모성지를 표시하는 입구에 들어서면 얕은 골짜기 지형을 살린 두 개의 커다란 탑 형식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로 쌓은 탑을 둘러싼 울타리 역할의 건물들도 같은 형태로 건물을 받치고 있다.

두 개의 탑 사이에는 50미터의 긴 빛의 틈이 시시각각으로 여러 곳의 땅을 밝히는 형태. 성당 내부를 비치도록 설계해 자연광이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영적 공간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곳은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지이다. 1991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모성지가 됐고, 이후 우리나라의 통일과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를 위한 기도의 장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봉헌 20주년을 맞은 2011년, 성지에 성모마리아 대성당 건립이 결정되면서 새 역사를 만들 대성당 건축의 장정을 시작했다. 세계적 건축가이자 삼성리움미술관, 강남 교보타워 등을 설계해 유명해진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를 맡았고, 여러 차례의 설계 보완 등을 통해 지난 2020년 마침내 준공을 보았다.

빛으로 빚어낸 위용과 함께 자연과 하나된 대성당은 전체 성지 조경 공사를 통해 순례와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浮石寺)

태백산과 소백산 힘찬 산줄기를 배경으로 세워진 경북 영주 부석사. 한때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무량수전으로 많이 알려졌던 부석사는 이제 부석사를 향해 올라가는 길의 은행나무 가로수와 가로수 아래 열린 영주사과의 빨간 조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해 질 무렵 부석사 대웅전 우측 언덕에 올라서서 보는 산사의 곡선은 그 뒤로 켜켜이 늘어선 능선과 부드러운 운무와 어우러져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사부대중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616년에 화엄종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 이 사찰은 의상대사가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아 오던 화엄(華嚴)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세워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됐다.

많은 사찰들이 유명세를 타면서 새로운 건물과 불상을 경쟁적으로 짓고 덩치를 키운 데 비해 부석사는 자연 경관과 철저히 조화를 이룬 기본 건물을 중심으로 옛모습과 우리만의 건물 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해준다.

인천 강화 성공회 강화성당

교회는 뾰족한 첨탑이 있어야 한다. 성당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고딕 양식의 화강암과 화려한 직선의 조화가 따라붙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보기 좋게 깨뜨릴 한국식 한옥교회가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다. 철저히 토착화된 교회를 지향하며 우리 전통에 녹아든 교회,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성공회는 개신교로 분류)이다.

섬 자체가 우리 근대사 박물관인 강화도답게 성당도 박물관의 일원이다. 경찰서와 읍사무소 등 청사 건물들이 산재한 작은 언덕에 올라선 듯 세워진 교회는 여느 오래된 사찰이나 오래된 한옥으로 보인다.

성당 전면의 작은 십자가가 아니면 불교 사찰이 더 잘 어울린다.

1900년 한옥으로 지어진 강화성당은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고요한(Corfe,C.J.) 신부 주도로 건립됐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 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 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킨 설계인데,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 양식으로, 외관과 외부공간은 철저히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지었다.

강화성당은 건물 자체가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기독교의 토착화 의지를 보여준다. 양복에 양식 건물을 거부하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안은 채 한국의 기독교가 되기 위한 노력의 단면이 건물 전체에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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