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몇 년째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을 오가며 치료하느라 소식이 한동안 뜸했던 친구 남편이다. 일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친구의 시한부 직장암 소식이다. 늦은 발견으로 이미 전이가 되어 수술로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했다.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듯 먹먹했다.

그와 나는 여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는 몸이 약해 고2 때 휴학을 해 졸업은 1년 늦었으나, 서로 ‘베스트 프랜드’라 부르며 줄곧 절친으로 지냈다. 바쁘게 살던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몇 년째 고생하던 중에, 이렇게 또 다른 시련이 온 것이다. 그는 교통사고 당시 가해자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고 모든 걸 용서해줄 만큼 가슴 따뜻한 친구였다.

5~6개월 시한부였던 삶이 2년을 넘기고, 그사이 아들도 결혼을 시키는 좋은 일도 있었다. 아들이 결혼하는 모습만큼은 꼭 보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결혼식 후 입·퇴원을 반복하더니 갑자기 외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3개월 만에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힘든 투병 생활 가운데 지친 그녀를 위해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분전환이 되고 추억도 많이 쌓을 기회를 자주 만드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단풍 곱게 물들던 어느 가을날은 그의 아파트 뒷산으로 김밥을 싸서 소풍도 갔다.

그를 마지막 본 날. 얼굴색은 어둡고 혀가 말려 발음은 어눌했지만 목소리엔 아직 힘이 있었다. 말기 암 환자들은 대부분 심한 통증으로 고통 받는다는데 그는 다행히 통증은 없는 것 같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평생 신실한 믿음으로 내생을 굳게 믿고 있어서일까.

죽음을 앞둔 그의 표정은 담담하면서 편안해 보였다. 침대에 앉아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와 서로 손을 맞잡고 마지막 절제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루를 더 견디고, 끝내 그는 외롭고 머나먼 길을 떠났다.

처음 시한부 암이란 소식 듣고 놀란 가슴으로 친구들과 함께 병실을 찾았을 때와 달리, 막상 그가 떠난 날은 이미 준비된 이별이어서인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슬픈 감정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오히려 차분하게 그녀가 천국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듯이 작별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친구와의 교제가 있었지만, 서로 흉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곰삭은 관계의 친구들은 몇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소중하기도 하고, 그들과의 이별은 더 큰 마음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몸의 상처가 시간이 흘러 흔적으로 남은 채 회복되듯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던 마음의 상처 또한 세월이란 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내적인 상처를 남기고 아픔이 희석되는 것 같다.

인생 황혼기인 지금, 곰삭은 관계의 친구들이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고 행운이다. 오늘도 나는 그들이 지켜주는 힘으로 오늘을 든든하게 살고 있다.

정경자 6·25참전유공자 정동숙의 장녀로, 초등학교 교사로 36년간 재직했다. 은퇴 후 때때로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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