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국은 일제의 치밀하고 단계적인 침략을 받았다. 일제는 외교와 군사적 방법을 동원해 대한 제국을 압박하였다. 이에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이 펼쳐졌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국 운동만으로 일제의 침략을 막아 내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과 이에 맞서 전개된 구국 운동의 맥락을 살펴보자.

1. 민족운동의 개요

(1) 국권 회복 운동과 독립운동

일제의 침략에 맞선 최초의 항일 투쟁은 망국(亡國)보다 훨씬 이른 1894년 7월 23일 시작되었다. 이른바 ‘갑오왜란’에 분개해 경북 안동에서 서상철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은 1945년 8·15 광복의 그날까지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한말 이래 줄기차게 대한 제국을 침략해 왔다. 국권이 기울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국권 회복 운동이 펼쳐졌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고 대한 제국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전 세계 피압박 민족 가운데 가장 혹독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제 한민족은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나서야만 했다. 한말에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과 일제 강점기에 펼쳐진 독립운동을 합쳐 민족 운동이라고 한다.

<국권 회복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은 1910년 대한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벌인 구국 운동을 말한다. 국권 회복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지닌 유생을 중심으로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선 의병 투쟁과 개화 사상을 지닌 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애국 계몽 운동의 두 계열에서 진행되었다.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국권 회복이라는 목표는 같았으나 방법론이 달라 쌍방 간에 대립과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에 직접 맞서기보다 먼저 실력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한 일부 애국 계몽 단체가 의병을 비판하는가 하면, 1910년에는 일부 의병 단체가 애국 계몽 단체가 설립한 안동의 협동학교를 공격해 교사와 학생을 살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상호 보완적 관계가 되었고 3·1 운동 이후 민족 운동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국권 회복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대한 제국은 멸망하였다.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에 비밀 결사가 조직되어 국권 회복 운동의 전통을 이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깨달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을 모색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형성된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동포 사회는 망국을 전후로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192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념과 방법론의 차이에 의해 분파도 있었으나, 꾸준히 통합을 모색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은 한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낸 역사적 결과였다.

(2)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운동의 이념은 독립 이후에 어떠한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목표를 말한다. 국권 회복 운동은 대한 제국을 지키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당연히 의병 등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보황주의(나라를 되찾은 뒤 군주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주장으로 복벽주의와 비슷한 의미)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보황주의는 일제에 의해 광무 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융희 황제(순종)가 즉위하자 점차 공화주의(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제를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정치적인 태도나 이념. 공화제를 채택하는 국가를 공화국이라 한다) 가 등장하면서 퇴색해 갔다. 1919년 2월 고종이 승하하며 정치 논의가 자유로워졌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으로 민주 공화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으로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가 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이념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가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각각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정당과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에 국내외에서 민족 운동 세력의 이념과 조직을 통합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민족 유일당 운동이라 한다.

여러 계열의 민족 운동 세력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이념은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 최고의 가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 이념을 현재 분단의 관점과 기준에서 논의하고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 국권 회복 운동

(1) 항일 의병

‘의병’이란 용어는 전근대 시기에도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항거하여 일어난 승려나 민중을 의병이라 하였다.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 때에도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의병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선명한 것은 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민군(民軍)이다. 서양사에서는 정의군이라 하고 우리 의병을 정의군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사실 의병은 의용군의 개념에 가깝다. 의병은 독립운동에서 무장 투쟁의 원형으로서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전승되었다.

<양반 유생이 주도한 전기 의병>

항일 의병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에 분개하여 일어난 이른바 갑오의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을미사변과 변복령, 단발령은 전국에서 양반 유생들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지닌 화서 학파가 중심이 되었고, 유인석이 전국의 의병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전기 의병은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는 양상을 보이며, 그 중심지는 충청도 제천과 홍주(홍성)이었다. 그러나 아관 파천 이후 개화파 정부가 무너지고,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들에게 해산을 명령하는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의 의병들은 해산하고 귀향하였다.

<평민 의병장이 등장한 중기 의병>

러·일 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주권이 심각하게 침탈당하자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1906년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이 홍성을 점령하였다. 최익현은 정읍과 순창 일대를 장악하였으나 동족인 관군과 전투할 수 없다며 스스로 의병을 해산하고 붙잡혔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된 그는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중기 의병장은 여전히 양반이 중심이 되었으나, 신돌석은 평민으로 의병을 일으켜 휘하에 양반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이 비밀리에 신하들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 봉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의병 전쟁으로 발전한 후기 의병>

항일 의병은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해산 군인이 의병으로 나서며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졌다.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의병으로 참전하며 의병은 전쟁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908년 13도 연합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이끈 허위는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교전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13도 연합 의병의 서울 탈환은 실패하였으나, 후기 의병에서 호남 지역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졌다. 호남 의병은 교묘한 유격 전술을 펼치며 일제에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수립하여 대대적인 의병 탄압에 나섰다. 이 기간 동안 의병장 100여 명, 의병 4,000여 명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고, 1907~1910년 동안 1만 8천여 명의 의병이 희생되었다. 국내에서 근거지를 파괴당한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3·1 운동 때까지 계속된 의병 투쟁>

1915년 7월 채응언 의병장이 평안남도 성천에서 붙잡혀 “나는 의병장으로 죽는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엄하게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국내 의병의 항일 투쟁이 모두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내에 남은 일부 의병 세력들은 산악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였다.

대부분의 의병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활동이 끝난 사화산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이었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3·1 운동 때까지 의병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3·1 운동을 주도한 의병(장)이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이는 3·1 운동이 민족 자결주의 등 외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의병의 잠재력이 내재적 요인이 되어 발발한 것임을 입증한다.

(2) 애국 계몽 운동

관료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결집한 계몽 운동가들은 문화적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통해 기울어진 국권을 일으키고자 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

일제의 침략에 맞서 많은 애국 계몽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를 외치며 조직된 보안회는 일본 군경과 충돌하며 이를 철회하는 데 성공하였다. 1905년 일제의 탄압으로 보안회가 해산되고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을사늑약 이후 정치 활동이 곤란해지자 교육, 언론, 종교 등 문화 운동을 펼쳤다. 헌정 연구회는 1906년 대한 자강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한 자강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시위에 회원이 참여한 문제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다. 그 후신으로 조직된 대한 협회는 정당 정치를 주장하며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침략에 타협적 자세를 보이거나 지도부가 친일적 행태를 보여 비판을 받았다.

<비밀 결사 신민회 활동>

1907년 결성된 신민회는 비밀 결사의 형태였다.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독립 협회 회원들이었고,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다수 참여해 활동하였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달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을 주장하고,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민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민회 회원들은 평양의 대성 학교와 정주의 오산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활발한 계몽 강연 활동을 펼치고 계몽 도서를 출판·보급하였으며, 민족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신민회는 망국을 예견하고 장기적인 투쟁에 대비하여 국외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독립군 기지 개척 운동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신민회의 국내 활동은 105인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회원 출신 인사들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투쟁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교육과 언론 활동>

계몽 운동가들은 민중 계몽과 신교육의 보급을 위해 학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 1월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교육 진흥과 지역 개발을 위해 기호 흥학회가 조직되었다. 비슷한 시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를 통합한 서북 학회가 조직되었다.

이들 학회는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를 발행하였으며, 기관지로서 월보를 발행하여 회원과 민중을 계몽하였다. 이들 학회의 활동 결과, 1910년경에는 전국에 2,000여 개의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항일 언론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권 회복 운동의 대표적인 언론은 ‘대한매일신보’였다. 해외의 경우 하와이에서 ‘신한국보’, 미주에서 ‘공립신보’와 ‘신한민보’, 연해주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이 발행되어 동포 사회를 계몽하고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하였다.

(3) 의열 투쟁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반대하는 상소 투쟁이 벌어졌다. 또한 자결로써 항거하거나 일제 침략에 적극 협력하거나 앞장선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이 전개되었다.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하였다. 1907년 나철과 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1908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이 통감부 외교 고문으로 친일 활동을 하던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하였다. 1909년에는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안중근 의거는 전 세계인에게 한민족의 자주 독립 의지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황선익 국민대 교수·박걸순 충북대 교수

<다음호에 이어짐>

주제열기 : 우리에게 독립의 의미

우리 민족은 국권이 흔들리던 시기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특히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이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인도주의에 입각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료읽기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는?

안중근은 일제에게 체포된 후 재판 과정에서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니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우하라”고 하였다.

특히 법정에서 검찰관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열거하며 자신의 행위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그가 제시한 ‘이등박문 죄악 15조’ 가운데 일부이다.

1.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 황제를 강제 폐위한 죄. 3. 을사늑약과 정미 7조약을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광산·산림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8.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한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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