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은 사라집니다. 화려한 봄꽃, 지금 피어나는 새싹,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 우리 모두 예외가 아닙니다. 사라짐, 죽음은 살아있는 것의 운명입니다. 오히려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에 가능합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계절에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른 생명과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최후의 축제입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만남, 죽음과의 만남> 정진홍

종교학자이자 철학자인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만남, 죽음과의 만남’에서 우리 모두가 정면으로 그것과 부딪치고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죽음과 만납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뜻하지 않은 참변, 교통사고 등 죽음은 뜻밖에 우리 삶 속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이 삶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왜 인간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봄 직한 물음입니다.”

“죽음 앞에서처럼 인간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처절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다시없습니다. 우리의 죽음 경험은 죽음이 그러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겪게 합니다. 단절, 절망, 허무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비존재와의 만남,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는 독특하게도 제사를 통해 죽음과 삶의 만남, 죽은 이와 산 이들의 만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인한 별리를 견디지 못하는 아픔 속에서 망자와의 만남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 꿈은 제사를 통해서 현실화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꿈의 실현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삶의 공동체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더불어 빚는 삶의 현실임을 터득합니다. 곧 제사는 죽음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무한한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 모두를 사랑한 사람에게, 제사는 그렇게 아름다운 몸짓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사랑한 사람에게 제사는 실현된 꿈입니다. 우리는 그 꿈속에서 더불어 살아갑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그러면서 그는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조용히 들려줍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삶이 너무 괴로워, 또는 너무 좋아서, 아니면 삶에 욕심이 나서 죽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구에 메아리치는 종교의 답변이 한결같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죽음 이후는 죽음 이전을 보완하고 완성하여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심판과 징벌, 보상과 위로 등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죽음 이후에 대하여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죽음 이후 때문에 두려워한다거나 위로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일은 죽음에게 맡기는 것이 옳을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죽음 이후의 현실성이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죽음이 두렵거든 지금 여기에서 더 착하고 바르게 살자. 참으로 괴로워 죽고 싶도록 죽음이 아쉽거든 더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자!”

‘더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사는 것’이 죽음이라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 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죽음을 이렇게 준비하자고 권합니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준거로 하여 살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험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그 깊은 신비의 심연을 드러내주지 않습니다. 무릇 종국에 의하여 비추어지지 않는 것은 그 과정의 의미를 확연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삶을 물으며 죽음을 묻지 않을 수 없고, 죽음을 물으며 삶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은 온갖 역설의 구조로 이루어집니다. 사랑도, 죽음도 그러합니다. 삶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초조해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을 감사하는 사람은 죽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합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박중철

박중철 호스피스의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죽음 현상과 죽음 현실을 이야기하며 ‘친절한 죽음’ 웰다잉(Well dying)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국인은 좋은 죽음을 바라면서도 대부분 그 바람과는 달리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인생을 아름답고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노화, 또는 질병과 싸우면서 치료 과정 중에 사망하는 것이 오늘날의 흔한 죽음의 모습”이라고 진단하면서 “병원 사망보다 더 나쁜 죽음은 없다. 잘 죽는다는 것은 집에서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병원은 주삿바늘이 쉴 새 없이 몸을 찌르고, 종일 시끄럽고, 밝은 불빛으로 잠들 수도 없고,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낯선 사람들 속에서 외롭게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우리는 후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또한 의료인들이 환자의 인간적인 죽음을 지켜주는 것으로부터 보람과 자부심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질문을 던집니다.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이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어 “의료인이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하는 죽음이 있다. 때 이른 죽음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 그렇다. 그뿐만이 아니다. 질질 끄는 죽음과 고통스러운 죽음도 의료인으로서의 사명을 걸고 막아내야” 하며, “죽음 자체를 막아야 할 때와 죽음이 비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막아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는 통찰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마무리합니다. “나도 그렇다. 어찌 죽음 앞에서 아쉽지 않겠는가? 내게 좀 더 행복을 누릴 기회를 신이 허락해 주면 좋겠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리석은 집착으로 더 비참한 구덩이로 빠져드는 것보다 웃으면서 남은 시간을 음미하며 내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 그렇게 살아낸다면 비록 아쉽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때론 용기 있게 체념하는 것도 행복을 지키는 지혜이다.”

행복하게, 행복한 마무리로 죽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머의 죽음도 활짝 웃으며 껴안을 이웃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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