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를 이겨낸 우리는 독립·호국·민주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일본 제국주의 강점, 전쟁, 독재라는 어두운 역사를 안고 있지만 독립운동, 국가 수호, 민주 혁명이라는 빛나는 역사도 갖고 있습니다. 독립·호국·민주로 집약되는 나라사랑의 역사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보훈의 시작입니다. 보훈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이들에 대해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2) 역사 속에서 보훈은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 국가 공동체를 온전하게 유지하게 한다

보훈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 굳건한 신뢰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가 건강하고 온전하게 유지되게 한다. 보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11세기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고 나니 옷을 걸치고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천하가 다스려졌다”라는 ‘서경’의 기록이다. 공에 보답하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기원전 431년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전사자 추모 연설에서 “국가는 지금부터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공공의 비용으로 양육할 것입니다. 이것은 귀한 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전투가 끝나면 생존자와 전사자 모두에게 영예를 줍니다. 미덕에 대하여 최고의 보답이 주어지는 곳에 국가에 봉사하려는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대 아테네가 국립묘지를 세워 전사자를 국장의 예우로 장례하고, 유자녀를 국가의 비용으로 부양한 것도 폴리스(polis)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올 것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장병들의 남은 가족을 책임져 주지 않는 국가라면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 강한 국가의 토대를 만든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과 보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에 오른 조지 워싱턴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어떻게 대접받고 감사받았는지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말을 남겼다.

국방의 성패가 보훈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에 주별로 시행되던 상이 연금 제도가 자원병의 모집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독립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이 세계사를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대규모 상비군과 보훈 제도가 큰 몫을 하였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안정으로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보훈 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훈의 강화와 국가의 융성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엘리자베스1세의 치세에 연금 제도가 창설되었고, 1682년 찰스2세 때 왕립 첼시 안식원이 세워졌다. 프랑스에서는 1674년 루이14세의 명으로 부상병의 치료와 생활을 위한 앵발리드가 건설되었다. 미국에서는 1860년대 중반에 국립묘지와 내셔널 홈이 세워졌고, 1930년 연방 정부에 보훈처(현 보훈부)가 설치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보훈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 국민의 정체성 형성과 국민 통합에 기여한다

국가가 독립을 이루고 지키는 과정에서 치른 희생은 지울 수 없는 집단적 기억이 되어 국민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정체성은 내면화되고 동질화되어 지속성을 갖는 신념이나 가치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애착심에 깊이 관여한다.

국민의 정체성은 일제 강점기 선열들이 혼이나 얼로 표현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18세기 계몽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민족 축제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찬양하며, 유가족들에게 영예로운 특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강한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그와 같이 보훈은 희생의 가치를 존중하고 전승함으로써 국민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결속과 통합에 이바지한다.

△ 윤리 의식을 높이고 명예 존중의 국민정신을 함양한다

명예 존중의 가치관은 사회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용기와 헌신, 그리고 책임 의식을 고양한다. 로마에서 귀족과 중산층이 전쟁의 선두에 섰던 것처럼 제1, 2차 세계 대전 때 유럽 지도층의 자제들은 자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증명하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이튼 칼리지 등 전통적 명문 대학 학생의 약 20%가 전사하였다. 참전 용사를 존경하고 예우하는 보훈 문화가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보훈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명예 존중의 가치관과 윤리 의식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다.

3. 역사와 함께하는 보훈

(1) 왕조 시대의 보훈

우리 역사에서 보훈에 관한 기록은 삼국 시대부터 나타난다. 신라는 전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포상을 통하여 통일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고려는 한층 더 발전된 형태의 보훈을 통해 거란 등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여 조선의 보훈은 광범위한 공신 우대 제도로서 통치 질서를 관리하는 성격이 강했다.

삼국 시대 : 삼국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는 자세한 보훈 기록이 전해 오지는 않지만 군공을 세운 장수와 후손에게 관직과 식읍·황금·말·곡식 등을 내려 준 것으로 보인다. 보훈 기록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신라이다.

진흥왕 순수비에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기미를 잘 살피며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자들에게는 상과 작위(爵位)를 더하여 그 공훈을 표창하고자 한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신라에서는 6세기 중·후반부터 보훈이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 46년(서기 624년)에는 ‘상사서(賞賜署)’라는 보훈 기구가 설치되어 군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보훈이 강화되었다. 또 ‘삼국사기’에 문무왕 9년(서기 669년) “군진에 나가서 공을 세운 자는 모두 상으로 보답하였고, 전사한 유혼들에 명복을 빌 재산을 추증해 주었다.”라는 내용의 보훈 기록이 확인된다.

고려 시대 : 고려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성종 14년(995년) 국초에 설치되었던 ‘사적(司績)’이라는 기구를 상서고공(尙書考功)으로 확대 개편하고 군공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상서고공은 원의 지배하에서 전조(銓曹)에 흡수되었다가 공민왕 5년(1356년) ‘고공사(考功司)’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공민왕은 “전쟁에서 죽은 장사들에게는 표창이나 관직을 주고, 그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이며, 만약 병사가 죽었으면 그 집을 구제하라.”라는 교지를 내렸다. 전사한 장병에 대한 보훈을 통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함께 보훈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쇠망하고 말았다.

조선 시대 : 조선의 보훈 기구는 국초의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시작으로 세종 때 충훈사(忠勳司)를 거쳐 1466년(세조 12년) 충훈부(忠勳府)로 개편되었다. 그와 별도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군공을 조사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군공청이 설치되었다가 전란이 수습된 후 폐지되었다. 충훈부는 고종 31년(1894년)까지 유지되다가 기공국(紀功局)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대한 제국이 선포된 후 1900년 전사하였거나 부상을 입은 장병에 대한 은전이 내려졌지만 얼마 가지 못하였다.

조선의 보훈은 처음부터 공신과 후손에 대한 특별 예우 제도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의병을 포함하여 군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보훈의 기록이 보인다. 전란 중에 전사자 명부를 만들고, 유가족에게 은전과 면역첩(군역이나 부역을 면해주는 증표)을 내려주었다. 임진왜란 후 1만여 명이 공신에 이름을 올렸지만 ‘지봉유설’에 의하면 실질적인 보훈이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18명, 호성공신(扈聖功臣)에 86명이 책정되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가 나라를 구한 이순신, 권율, 원균, 김시민, 권응수, 이정암 등의 선무공신에 비해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뒷바라지한 호성공신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곽재우나 고경명과 같은 의병장들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1900년 국립묘지 성격의 장충단(현 장충단공원)이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일제가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졸들을 안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군악과 조총 의식으로 이들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근대적 현충 의식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장충단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다

(2) 대한민국의 보훈

대한민국의 보훈은 1950년 4월 ‘군사원호법’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과 전후 복구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으로 전상 군경과 전몰 군경 유가족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회적 불안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1961년 군사원호청의 설치로 보상금, 의료 보호, 직업 보도, 교육 보호, 정착 대부, 양육·양로 보호 등 각종 지원 제도가 마련되었다. 1962년부터 독립 유공자, 4·19 혁명 희생자, 재일학도의용군인 등이 적용 대상에 포함됨에 따라 군사원호청이 원호처로 승격되었다.

1984년 ‘국가 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은 보훈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이 법의 제정으로 생계 지원 위주의 ‘원호’에서 물질적 보상과 정신적 예우가 균형을 이루는 ‘보훈’으로 전환되었다. 그에 따라 ‘원호 대상자’가 ‘국가 유공자’로, 원호처’가 ‘국가보훈처’로 각각 개칭되었다. 이로써 국가보훈처는 국가 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와 애국 정신의 계승·발전을 임무로 하는 조직의 기능과 위상을 재정립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5·18 민주 유공자, 6·25 전쟁 및 월남전 참전 유공자 등이 보훈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5년 ‘국가 보훈 기본법’ 제정으로 범정부적 차원의 보훈 정책 추진 체계가 수립되었다.

독립기념관이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립대전현충원이 국방부로부터 국가보훈처로 이관되었다. 2020년 ‘유엔 참전용사의 명예 선양 등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보훈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기억의 전승과 공훈 선양을 위한 활동이 보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제열기 :우리나라 보훈의 어제와 오늘

6·25전쟁으로 수많은 상이용사가 발생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전담 기구도 없었고, 치료조차 어려웠다. 1961년 상이군경과 전몰군경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원호청이 발족되었다. 같은 해 사회부(현 보건복지부)의 구호병원을 인수한 국립원호병원이 개원되었다. 국립원호병원은 현 보훈병원(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산하 6개소)의 전신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발전과 함께 보훈 기구, 제도, 시설에도 큰 틀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 보훈의 역사를 알아보고, 보훈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책무를 생각해 보자.

자료읽기 :실학자 이수광은 조선의 보훈을 어떻게 보았을까

“권양촌(권근)이 신라의 법에 대하여 말하기를 전사자의 장례를 후히 지내고 작과 상을 그 일족에게까지 내리니 그 영화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다투어 공을 세웠다. 지금 들으니 왜노(일본)의 풍속이 그러하다고 한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상을 중히 하면 반드시 죽기로 싸우는 장졸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공명을 중하게 하고 있을 뿐이니, 아무런 혜택도 없는 헛된 상으로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수광 ‘지봉유설’

군도부, 상공(賞功)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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