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한편에는 가진 것, 현실을 떠나 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든 쉬이 ‘가진 것’을 버릴 수는 없는 법.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가 “삶 속에서 조금씩 몸의 힘을 빼고, 미련을 내려놓고,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겨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법정스님 ‘무소유’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다 진리를 찾아 속가를 떠난 법정스님이 수행 후 출간한 수필집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삶을 보다 여유롭고 평온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을 전한다.<법정, 범우사, 절판>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불교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 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가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 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밤 열 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헌신적인 정성에 나는 어린애처럼 울고 말았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래야 40여 리 밖에 있는 구례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이다.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온 것이다. 서로가 돈 한 푼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처음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해인 수녀 ‘기다리는 행복’

 

종교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인사를 건네온 이해인 수녀의 산문집. 동명의 시 ‘기다리는 행복’에서 ‘온 생애를 두고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이라는 표현처럼 기다리는 설렘과 그리움이 담겼다.<이해인, 샘터>

△ 세상에 사는 동안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힘을 빼는 일인 것 같다. 최근에는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매번 힘이 들어가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지니 제발 좀 힘을 빼고 편하게 있으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몇 년 전엔 방사선 종양내과에 다니며 수십 번의 치료를 받은 일이 있는데 암 환자는 곧장 치료에 들어가지 않고 얼마간 별도의 방에 들어가 방사선을 쏘이는 인체의 부위에 따라 힘을 빼는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침대에 엎디어서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데 생각처럼 쉽질 않았다. “힘을 빼라는데 수녀님은 반대로 자꾸 더 힘을 더 주고 계세요. 힘을 빼야만 빛을 잘 쪼일 수가 있어요.” 매번 이렇게 지적을 당하는 일이 나는 부끄럽기만 했다. 그 이후로 방사선을 쪼이는 시간 자체는 길지 않았으나 치료 이전에 힘 빼는 일이 잘되기 위해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좀 더 특별한 것을 체험하고 싶고, 인간관계 안에서도 좀 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고, 문학의 길에서도 좀 더 멋지고 특별하고 싶은 욕심과 허영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괴롭힐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평범하지 않고서는 특별한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이 대로는 지루한 사막처럼 여겨지기도 할 테지만, 나를 시간 속에 길들이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바로 평범함을 견디고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입니다’라는 이 말을 나는 요즘도 강연 중에 자주 인용한다. 독자들이 책에 사인을 요청해도 이 구절을 많이 적어 주곤 한다. 아주 오래전 내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적에 어느 날 친지들이 안내하는 선물의 집에 들른 일이 있다. 거기서 조그만 크기의 책갈피를 하나 사게 되었는데 그 안에 적혀 있는 바로 이 글귀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 순간 이 글이 내 마음에 어찌나 큰 울림을 주었는지!

그래서 평소에 늘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살게 하소서!”하던 기도를 “오늘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바꾸어서 하게 되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하지만, ‘첫날’이라는 말에는 설렘과 기쁨을 주는 생명성과 긍정적인 뜻이 담겨 있어 좋다. 오늘도 새소리에 잠을 깨면서, 선물로 다가온 나의 첫 시간을 감사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 새로운 기회를 더욱 잘 살리도록 노력해야지’하고 다짐하였다.

△6~7년 전 어느 날. 교정에서 주워 모은 낙엽과 꽃잎들이 모습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책갈피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날짜까지 적혀 있는 은행잎, 코스모스꽃잎과 줄기, 장미 잎사귀. 그중에는 친구 데레사가 사인해준 것도 있다. 문득 두꺼운 책장들을 넘기다가 하나하나 그것들을 끄집어내면서 나는 얼마나 새삼 놀랍고 반가웠는지! 꽃을 모을 때의 그 마음은 너무도 철저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지금 멋없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아직 되지도 못했지만) 쓸쓸해지는 마음. 명숙 소녀의 그 찬란했던 꿈을 나는 사랑한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소망은 높이 높이 뻗어 올라서 미루나무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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