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서비스가 일반적인 재화 혹은 서비스와 구별되는 사회경제적 특징으로는 공급자의 면허제도와 정보독점에 의한 독점시장, 감염병처럼 한 사람의 감염이 사회 전체로 번질 수 있는 외부효과의 존재, 의식주와 마찬가지로 생존에 필수적인 서비스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의료시장에서는 면허를 가진 의사만이 독점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감염병처럼 한 개인이 스스로 대처할 수 없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 질병도 있다.

의료서비스는 무엇보다 생명과 직결되므로 인간이면 누구든지 경제적, 지리적 장벽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의료시장의 경우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고, 필수의료에 대해서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모든 국민에게 형평성 있게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른바 공공의료체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 공공의료체계는 의료공급체계(공공병원과 의료인력)와 의료수요체계(공공재원)로 구성된다. 

공공의료 기반 구축 시급한 현실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의료는 의료시장에 대한 단순한 국가 개입이나 사회연대성의 원리를 넘어서는 당위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제도주의나 잔여주의를 뛰어넘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당위적 보상이라는 특징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훈의료제도는 공공의료체계 내에서 사회적 가치의 의무적 실현을 추구하는 특수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훈의료는 보훈복지와 연계해 하나의 국가기관에서 의료와 복지가 동시에 제공되는 단일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의 보훈병원과 보훈요양병원, 위탁의료기관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보훈환자를 위한 보장구의 개발과 보훈요양원 등은 우리나라 복지서비스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의료와 복지의 통합적 연계라는 측면에서 보훈의료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최근 우리는 메르스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공공의료 자원이 얼마나 부족하며, 공공의료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체 병상 중에서 공공병상 수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이 72%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0%에 불과해 OECD 국가 중에서 꼴찌에 위치하고 있다. 공공의료를 뒷받침하는 의사 인력 역시 OECD 평균이 3.5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국가유공자를 진료할 보훈병원 네트워크를 전국적으로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공공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보훈의료가 향후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진료범위를 확대한다면 지역 공공의료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료는 의료서비스 제공의 형평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 된다.

미국, 의료·요양 네트워크 잘 갖춰

보훈의료체계가 가장 발달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 세계의 경찰로서 상시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다보니 전상자가 많아 보훈의료가 질적, 양적으로 발달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의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련병원 중의 하나가 보훈병원이다. 다양한 증상을 가진 환자를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보훈의료체계는 보훈병원과 보훈의원, 장기요양기관이 전국적으로 잘 갖춰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겪은 보훈환자가 고령화됨에 따라 장기입원환자와 요양환자의 비중이 높은 상황이다.

미국은 각 지역에 복수진료과목을 갖춘 외래진료소가 발달되어 외래진료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보훈의료의 공급능력이 제한적이어서 민간의료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미국의 보훈병원은 의과대학 실습병원으로 활동성이 높지만 우리나라의 보훈병원은 의과대학 부속병원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보훈의료는 전쟁 관련 국가유공자의 급속한 고령화와 사망 증가에 의해 위기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상자, 중장기복무 제대군인 환자 등이 점차 증가하고 있어 향후 10여 년간 보훈환자는 완만한 감소 추세를 보이다 2030년 이후에는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최근 논의되고 있는 모병제가 도입된다면 장래 보훈의료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보훈의료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전달체계, 디지털진료 검토

이러한 환경여건의 변화를 고려해 향후 보훈의료의 발전방안을 수립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보훈병원의 공공의료 기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향후에도 국가적 재난 수준에 해당하는 감염병 위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훈환자뿐만 아니라 지역의 일반 환자를 적극적으로 담당함으로써 부족한 공공의료자원을 보충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감염병 위기 발생 시기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보훈환자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통상적인 진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으며, 보훈의료에 대한 국가유공자의 수요가 정체되는 시기에는 더더욱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료 기능을 확대하는 정책이 보훈의료의 지속적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보훈의료에서 국가유공자를 위한 돌봄서비스의 제공이 확대돼야 한다. 특히 보훈병원과 보훈요양병원 입원환자를 위한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확대가 시급하다. 전국 6개의 보훈병원에 입원한 보훈환자와 그 가족의 간병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에서 시행하고 있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전면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보훈요양병원 입원환자에 대한 간호간병서비스는 보훈처 자체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제한된 보훈의료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배분, 의료비 절감을 위해 보훈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질환의 중증도에 근거하여 중앙보훈병원-지방보훈병원-보훈요양병원-위탁의원으로 이어지는 보훈의료전달체계를 실효성 있게 구축해 보훈의료의 질을 높이고, 국가유공자에 대한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고령 국가유공자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지역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복수진료과목으로 구성된 보훈의원의 도입과 국가유공자 예우에 상응하는 보훈호스피스 서비스의 질 향상이 필요하다.

넷째, 4차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디지털 헬스 기술에 기반한 보훈환자의 만성질환관리를 위한 디지털진료의 개발과 확산이 필요하다. 지리적으로 넒게 분포하는 보훈환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국 보훈의료기관의 전산망 통합과 이를 개인 휴대전화와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디지털서비스 제공이 필요하다.

다섯째, 향후 전쟁 관련 보훈환자가 고령화로 거의 종결되고, 공상자와 중장기 복무 제대 군인이 보훈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들을 위한 진료서비스 체계를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다. 지역주민을 위한 통상적인 진료서비스 체계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의료인력과 의료시설을 보강하는 한편 보훈병원의 입지를 고려해 교통 접근성이 편리한 곳으로 보훈병원을 이전하는 방안도 중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보훈의료 의대·간호대 설립 추진을

여섯째, 국군병원과 보훈병원의 연계와 협력이 필요하다. 현행 군 의료체계는 군 장병에게 적절한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기에는 의료시설과 의료장비, 의사인력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므로 전문적인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갖춘 보훈병원과 연계, 협력을 통해 부족한 군 의료자원을 보완할 수 있고, 국군 장병들에게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훈병원을 운영할 의사와 간호사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보훈의료에 특화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의 설립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현재 의사와 간호사 모두 부족한 상황인데, 특히 공공의료기관의 의료인력 부족은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보훈의료 부문에서 의대와 간호대를 설립하면 보훈병원뿐만 아니라 경찰병원, 소방병원, 군병원, 적십자병원 등을 운영할 의료인력으로 공동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훈병원의 의료시설이 잘 갖추어져도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의료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보훈의료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전국의 공공병원 중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비교분석해보면 보훈의료의 미래가 보인다. 취약계층 환자 위주로 진료하거나 의과대학의 지원이 없는 지방의료원과 교통요지에서 벗어난 지방의료원은 거의 폐업 직전이지만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국립대학병원과 연계해 건강보험환자의 진료기능을 강화한 지방의료원은 모두 성공했다. 보훈의료에 특성화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설립되면 진료기능뿐만 아니라 보훈의료에 특화된 연구기능도 기대할 수 있다. 보훈의료의 미래는 지금부터 준비해도 결코 빠르지 않다.

김진현 서울대 교수, 보건경제학박사

※이 글의 내용은 국가보훈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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