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서훈 대상자 발굴과 포상을 적극 추진해왔다.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점으로 이제까지 소홀했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보이는 한편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학생, 교사, 간호사, 승려, 기생, 정치인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에 대한 관심과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2021년 3월 기준으로 서훈된 여성독립유공자는 526명으로 2011년 3월 여성독립유공자 224명에 비해 2배 이상이 되는 성과를 보였다.

보훈은 정부와 국민의 관심에서 시작된다. 기존의 보훈 프레임에서 여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시기는 2016년 정도로 볼 수 있다. 당시 대중영화를 통해 묘사된 역동적인 여성투사는 조국이 처한 상황을 주시하고 구국전선에 나선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안타깝게도 이때까지 ‘헌신과 공헌’을 강조한 보훈의 가치에 기존의 여성은 수동적 존재 혹은 헌신의 대상으로 제한되면서 국가·여성·보훈에 대한 담론은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은 국내항일운동, 학생운동, 의열투쟁, 만주방면, 노령방면, 중국방면, 임시정부, 광복군, 미주방면 등 전 운동계열에서 포착되며 분명하게 항일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한국근현대사를 통괄하는 보훈의 역사에 여성은 국가존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의 대열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여성보훈 관련 연구 부재와 서훈 심사과정에서의 여성전문가 부재는 여성독립운동을 이해하는 폭이 좁아지면서 홀대로 이어졌다.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 구성원으로서 목숨을 건 여성의 투쟁에 비해 국가의 실질적인 보상과 예우의 기준은 현실적이고 엄격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례에서 확인된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처단한 안중근 가(家)의 여성들은 안중근 순국 이후 중국과 러시아 북만주 일대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독립자금과 문서 전달, 군복수선과 군복지원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흔적을 남기거나 기록하는 것은 가족 전체의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로 위험한 현실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모친 조마리아, 부인 김아려, 여동생 안성녀, 조카, 며느리 등 여성은 3대에 걸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실천했지만 서훈 입증자료는 부족했다. 국외의 만주, 러시아, 멕시코, 쿠바 등에서 남녀동권의지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실천한 여성독립운동가 역시 자료 부족과 동시에 소멸된 자료에 대해 무관심한 채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도 여성들의 독립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활발하게 이어졌다. 미군정기 재편된 경찰체제와 치안기구가 개정 확대되는 과정에서 신설된 여성경찰서의 초대 서장인 양한나를 비롯해 전창신·안맥결·노마리아 등 여자경찰서장은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오광심과 오희옥, 민영숙 등 여성광복군으로 활동한 이들을 비롯해 해방 이후 공군창설과정에 기여한 여성비행사 권기옥은 한국 공군의 어머니로 주목받았다. 여성독립정신은 여성보훈정신의 맥으로 형성되어 실천되고 계승되고 있었다.

국방부는 ‘건군사’를 통해 군의 건국이념이 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고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성장·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흐름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군 정신도 여성광복군 정신의 계승 차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여군 만 명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 대한민국 여군의 정신적·역사적 근원도 여기에 둬야 할 것이다.

보훈정신은 나라사랑의 정신적 원동력이며 국민 정신력의 요체이다. 역사와 보훈, 국가와 여성, 보훈과 여성의 관계가 국민정신의 역사이며 여성 구국의지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다. 개인보다 국가를 생각한 여성의 나라사랑정신과 구국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보훈의 가치에서 매우 유의미한 것이다. 여성광복군·여성경찰·여성군인으로 이어지는 맥락은 한국여성의 구국의지가 구체화되는 역사와 상통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임시정부 산하의 여성광복군, 그리고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의 활약과 그 정신적 줄기가 현대의 여성경찰과 여성군인,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6·25전쟁은 여군 창설로 여성과 보훈의 관계가 구체화된 시기이다. 대한민국 여군은 1950년 전후 육·해·공군 전역에서 창설됐다. 공군은 1949년 1월 15일 여자항공병 1기 15명의 입대를 시작으로 2월 15일 ‘여자항공교육대’를 창설한데 이어 10월 1일 여자항공대로 개칭했다.

육군은 ‘여자청년호국대지도자훈련’에서 배출된 여자배속장교 32명이 육본특명 제164호에 의해 1949년 7월 30일자로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했고, 1950년 1월 1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에 의해 그중 10명이 현역으로 편입되면서 육군 최초의 여군이 탄생했다.

해병의 경우 6·25전쟁 발발로 제주로 피난을 온 여성과 제주출신 여성이 해병에 지원하면서 1950년 8월 31일 최초의 여성의용대 창설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해군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뒤 1950년 8월 31일 해군통제부 주관의 여자해병으로 처음 탄생했다.

여군은 6·25전쟁 과정에서 육·해·공군의 여군활동과 함께 간호장교로 전장에 나섰고 참전활동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후 국내와 베트남 참전, 해외 파병 등의 모든 시기에 전후방에서 당당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짚어보면서 보훈 영역에서 여성과 보훈의 관계가 정립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국가 위기에 자발적으로 결집된 의병(義兵), 국민개병(國民皆兵)의 관점에서부터 여성과 보훈의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천만 충의자녀가 다 독립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고 선언했다. 1920년 ‘독립신문’은 ‘국민개병의 제1성’ ‘다시 개병으로 대하야’ ‘국민개병의 첫 소래’ 등 ‘국민개병’의 모든 논의에서 남녀 구분을 없앴다.

여기에 맞춰 여성들 또한 ‘안사람의병단’ ‘여학생결사대’ ‘부녀복무단’ ‘여성재봉부대’ ‘부인결사대’ ‘애국부인회’ ‘여성광복군’ ‘대한여자애국단’ 등 여성의 국민개병의지를 적극 실현했다.

임시정부·만주·중국·노령·연해주 등 독립군의 격전지에서 독립군단의 군복을 제작하거나 연락책 역할·정보수집의 지원활동, 폭탄투척·암살·저격활동 등의 의열투쟁을 비롯한 미주지역 여성의 독립의연과 국민의무금 활동은 국민개병의지를 확고히 보여준 사례로 남아있다.

둘째, 상호작용의 매커니즘 시각에서 여성과 보훈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여성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공동목표와 연대감, 소속감, 민족의식을 공유한 주체적 존재로 인식돼야 한다. ‘국가’ ‘독립’ ‘집안’ ‘단체’의 공통분모의 시각에서 볼 때, 대부분의 여성은 가족공동체나 단체의 일원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했기 때문에 활동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서류화하는 데는 소홀했다.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지만 여성은 활동입증 자료의 부족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이를 발굴하고 인정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보훈정책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 활동을 다면적 시각에서 확인하고 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반면 ‘호국’ 분야에서는 6·25전쟁에 참전한 여군의 활동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비교적 충분해 역사적 기여를 인정하고 개인의 공훈과 국가유공자로 선정하기에 무리가 없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것은 이후 4·19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 과정 등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는 ‘민주’ 분야의 경우도 비슷하다.

셋째, 여성과 보훈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아카이빙(기록) 구축이 필요하다.

의병운동, 국채보상운동, 3·1운동, 국내외 독립운동과 해방정국, 미군정기, 6·25전쟁, 민주화운동의 모든 과정 등 험난했던 역사의 순간 순간에 여성은 구국의지를 발휘했고 나라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면에서 아직 미흡하기 그지없는 여성운동 관련 자료와 인물 활동의 교차점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빙 구축을 통해 부족한 자료를 정리해 나가야 한다.

보훈의 역사에서 근현대사를 통괄하는 여성보훈의 정신적 근간을 정리한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을 직시한다면 늦었지만 여성보훈과 관련한 연구, 다양한 출판물 발간 등을 통해서 자료와 연구를 축적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제는 보훈의 영역에서 소외된 여성과 보훈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국가보훈처 나라사랑·보훈교육연구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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